2020-10-30 02:14
[김재필 '에세이'] H에게-둥글둥글 굴러가는 곡선의 말
[김재필 '에세이'] H에게-둥글둥글 굴러가는 곡선의 말
  • 김재필 사회학 박사
  • 승인 2020.01.3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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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절이 하 수상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습관적으로 시를 찾게 되네. 시를 읽으면 일단 모든 근심걱정이 다 사라져서 좋거든. 먼저 이번에 제주 올레를 걸으면서 혼자 읊었던 김선태 시인의 <곡선의 말들>을 함께 읽어 보세.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무심코 지나치는/ 걸어가다, 돌아가다, 비켜가다, 쉬다 같은 동사들…/ 느리다, 게으르다, 넉넉하다, 한적하다, 유장하다 같은 형용사들…/ 시골길, 자전거, 논두렁, 분교, 간이역, 산자락, 실개천 같은 명사들…// 직선의 길가에 버려진/ 곡선의 말들.

지난주에는 친구들과 함께 제주올레에 다녀왔네. 구불구불 돌아가는 올레 1, 2코스를 느릿느릿, 쉬엄쉬엄, 걸으면서 곡선의 미를 만끽했지. 직선으로 난 큰 길을 따라 가는 자동차 여행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제주의 속살들을 발로 천천히 걸으면서, 가끔 게으름도 피우고 넉넉하게 쉬기도 하면서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인 올레는 대부분 곡선이네. 이번에 직접 오르거나 멀리서 바라보았던 말미오름, 알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등도 모두 곡선이고. 물론 첫날 걸었던 우도 올레도 섬 둘레를 둥글둥글 돌아가는 곡선의 길이었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제주의 바다와 오름들을 실컷 보고 왔어. 곡선의 길과 오름들은 걷기도 좋고, 멀리서 바라만보아도 좋았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자연의 선이니 그럴 수밖에.

말도 마찬가지야. 각이 있거나 날이 선 말들은 직선이네. 날이 너무 날카로워 상대를 찌르고 아프게 하지. 상대에 관해 잘 알지도 모르면서 혼자 판단하고 규정하는 말들이 대부분 직선이네.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선입견이나 편견이기 쉽지. 반면 곡선의 말들은 모가 나지 않아. 둥글둥글 굴러가는 곡선의 말들을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함께 구르지. 그래서 마음이 편해. 그런 말들은 서로 부딪쳐도 불꽃이 튀지 않아. 서로 부드럽게 안아주기 때문이야. 게다가 곡선의 말들은 느리고 유창해. 서로 이기려고 다투지도 않아. 그러니 곡선의 말들이 많은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수밖에 없지. 서로 모가 나지 않으니 싸울 이유가 없거든.

좀 부끄러운 자랑일지 모르지만, 지난 5년 여 동안 사진공부하면서 변한 게 많네. 그 중 하나가 말수가 적어지고 부드러워 진 거야. 카메라로 바라보는 거의 모든 피사체가 다 신비하고 아름다우니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작품을 얻기 위해 피사체에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네. 이런 훈련을 통해 허형만 시인이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겨울 들판을 지나가면서 깨우쳤던 것처럼, 나 또한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않게 되었지. 대상이 뭐든 직접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지 않고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된 거야. 그러니 자연스럽게 말이 줄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말이, 그것도 남을 욕하고 저주하는 폭력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네. 날마다 페이스북이나 스위터 등 SNS에 남을 헐뜯고 욕하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말만 올리는 유명인들도 많아지고 있어. 이런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은 온전할까? 각이 선 직선적인 말들은 그런 말을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피폐하게 만드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거칠고 성낸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지. “거친 말을 쓰지 말라.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성낸 말은 고통이다. 보복의 채찍이 너의 몸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의 말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으니…

며칠 지나면 벌써 입춘이야.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불안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시 <봄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네. “어느 소년 소녀들이나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 살아라, 뻗어라, 피어라, 바라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말라.”이런 말들이 어디 소년 소녀들에게만 필요한 것인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힘이 되는 격려의 말들일세.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네. 남 욕하거나 비웃거나 혐오하는 말들은 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