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4 02:15
[이영종 ‘평양에선 지금’] ‘우한 폐렴’에 긴장하는 평양
[이영종 ‘평양에선 지금’] ‘우한 폐렴’에 긴장하는 평양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0.01.3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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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인 ‘우한 폐렴’의 충격파에 평양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체제 특성 상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 온 북한은 외부로 통하는 항공로와 주요 루트를 아예 전면 차단하다시피 했다. 외부 소식에 다소 둔감하게 움직이던 관행에서 벗어나 우한 폐렴 관련 소식은 거의 실시간으로 주민들에게 전하며 유입방지에 전력투구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그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29일자 노동신문은 “모든 당 조직들에서는 신형코로나 비루스 감염증의 전파를 막기 위한 사업을 국가 존망과 관련된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여기고 정치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칫 방역망이 뚫렸다가는 체제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드러난다.

설 명절을 앞두고 밀어닥친 우한 폐렴 사태는 북한 당국에 매우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 경제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지난해 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주재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소위 ‘정면 돌파전’을 선언했다. 올 신년사를 대체한 전원회의 결정문은 대북제재 아래에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가며 장기전을 펼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농업생산 등 경제 각 분야에서의 자력갱생형 성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내용에 상당 부분이 할애돼있다.

하지만 우한 폐렴은 경제 부분에 주름살을 깊게 하는 건 물론이고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한 외화벌이 등 북한 당국이게 산소호흡기 역할을 할 자금줄에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의료·보건지원을 받아왔다.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이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부침이나 북한 내부 사정에 따라 대응이 들쭉날쭉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14년 우리가 전달한 구제역 확산 방지 및 퇴치 지원 의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남측과의 협력에 거부감을 보인 적도 적지 않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측은 보건·의료 협력을 당국 간 합의로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보건·의료분야 협력 방안에 대해 합의한 것이 그 결실이다. 당국 간 보건·의료분야 회담에서는 결핵과 말라리아 등 전염병의 진단 및 예방·치료에 힘쓰기로 의견을 같이하기도 했다.

특히 이 회담에서는 남북한이 전염병 유입과 확산 방지를 위해 정보교환과 대응체계 구축 문제들을 협의하고 기술협력을 비롯한 대책을 수립하기로 하는 등 방역체계와 감염병 예방 및 대처에 초점이 맞춰져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안타까운 건 이후 남북관계 경색과 북한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구체적 진전을 보지 못한 점이다. 열악한 보건·의료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이 조금 더 전향적이고 남북협력적인 자세로 나왔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무상교육과 함께 무상치료를 이른바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주요 근거로 내세워 왔다. 무상치료를 주민의 기본 권리로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와 큰 거리가 있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사회제도의 비효율성, 의료보건 부문의 부패 심화 등의 문제로 인해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헌법상의 치료와 건강증진 관련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거의 길은 막혀 버렸다. 특히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어려움을 겪던 북한에 199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닥쳤다. 결국 북한이 체제 선전차원에서 내세워온 무상치료의 길은 멀어져 갔고,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의 건강은 심각한 위협을 받는 상황에 봉착했다.

당시 북한의 열악한 의료 실태는 평양에 체류하며 대북 의료지원 활동을 벌인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 씨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북한에서 의료지원 활동에 나선 폴러첸 씨는 심한 화상을 입은 북한 노동자에게 자신의 허벅지를 도려내 피부이식을 실시할 정도로 헌신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폴러첸 씨는 북한 정권이 인권을 유린하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지원받은 식량을 주민들에게 제대로 나눠주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을 알게 됐다. 그는 열악한 북한의 의료시설을 서방에 폭로했고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결국 폴러첸 씨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열악한 북한의 의료보건 상황을 돕기 위한 대북 의료지원은 단순 약품 지원에서 의료장비 제공, 병의원 건립까지 이어지면서 활동 폭을 넓혀왔다. 특히 2004년 4월 평북 용천군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구호과정에서 대한적십자사나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 의약품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 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은 북한에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 국민들의 정성이 담긴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남위협과 도발노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남북관계도 얼어붙는 바람에 의료·보건 분야의 협력은 더 요원해졌다.

지난해 5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창궐 사태는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줬다. 발병 사실을 은폐하고 자체적으로 수습하려던 북한 당국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신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엔 자강도 우시군 지역 농장에서 발생했지만 점차 확산돼 평양 근교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손쓰기 어려운 단계가 된 것이다.
 
안타까웠던 건 북한이 돼지열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남북협력에 미온적이거나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북한 지역에서 최초 발병한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정부는 북한에 방역 협력을 제안했고, 남한 지역 내 발병이 확인된 9월 18일에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연락대표 접촉을 통해 재차 협력하지는 통지문을 전달했다. 하지만 북한은 호응하지 않았다.

최근 북한 매체들의 보도를 살펴보면 평양의 보건 당국은 우한 폐렴이 유입되지 않도록 하는데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통하는 길을 물리적으로 전면 통제하는 건 제대로 된 답이 되기 어렵다.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의료·보건 분야에 대한 투자와 물적·인적 역량의 축적, 과학적인 선진 방역·치료 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강조하는 민생우선이나 ‘정면돌파전’ 구호의 이행도 국제사회를 뒤흔드는 신종 감염병 앞에서는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정부와 국민이 내민 남북 의료·보건 협력의 손길을 북한 당국은 마주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