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서예진 기자   “플렉스(Flex) 해버렸지 뭐야”

최근 들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바로 ‘플렉스’다. 플렉스는 원래 ‘구부리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자랑할 때 쓰이며 ‘과시하다’라는 의미가 더해졌고, 1990년대 들어서는 ‘재력, 귀중품 등을 과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당시 미국 래퍼들 사이에서 누가 더 성공했는지 과시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귀중품 등을 과시하는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래퍼 염따가 지난해 8월 한 방송에서 고가의 물건을 자랑하며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라는 말을 했고, 배우 이동욱이 진행하는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에서 출연진들이 자기 자랑을 하며 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올해 소비트렌드는 일상적인 상품에는 가급적 지출을 줄이면서도 패션과 가전 등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상품에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 이른바 '플렉스하는 자린고비'가 될 것이란 조사 결과가 나왔다. / 이베이코리아
귀중품 등을 과시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플렉스'라는 단어가 업계에 화제다. 소비자들이 생필품은 가성비를 중시하고, 원하는 고가의 물건 앞에서는 과감하게 지갑을 열기 때문이다. / 이베이코리아

◇ 굴비 보고 맨밥 먹듯… “원하는 물건이라면 삼각김밥도 괜찮아”

그렇다면 플렉스 소비는 어떤 형태를 보이고 있을까. 우선 평소 사용하는 식품·생필품 등은 싼 가격의 물건을 구매한다. 예를 들어 끼니는 삼각김밥 등 간편하고 저렴한 식사로 대체하고, 평소 입는 옷은 온라인 몰에서 쿠폰과 포인트를 긁어모아 최대한 저렴하게 구매한다. 그러나 사고 싶은 명품·차·가구나 프리미엄 가전에는 과감하게 지갑을 여는 것이다.

이는 ‘가성비’(가격 대비 최고의 성능을 갖춘 제품),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가 높은 제품)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탕진잼’(탕진하는 재미) 등과는 사뭇 다르다. 플렉스 소비를 위해 평소에는 가성비를 중시하며 돈을 모아두고, 사고 싶은 물건에는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다. 마치 굴비를 걸어두고 쳐다보며 맨밥을 먹던 ‘자린고비’를 연상시킨다.

이베이코리아는 이런 소비 형태에 대해 ‘플렉스 하는 자린고비’라고 정의했다. 이베이코리아가 지난달 소비자 1,91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주로 생필품에 돈을 아낀다. 생필품은 고정으로 지출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싸고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는 품목’을 묻는 질문에 4명 중 1명은 ‘생필품·생활용품’(26%)을, 응답자 20%는 식품을 꼽았다.

반면 원하는 물건에선 플렉스를 한다. ‘비싸도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는 품목’으로는 명품을 포함한 ‘패션·뷰티’(23%)와 ‘디지털·가전’(23%) 카테고리가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이어 식품(13%)과, 가구·인테리어(12%) 순으로 나타났다. 성별로 나눠보면 여성은 ‘패션·뷰티(명품)’(25%)을 꼽은 반면, 남성은 ‘디지털·가전’(28%) 제품을 선택했다.

게다가 이런 소비 트렌드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구인구직 매칭플랫폼 사람인이 2030세대 3,064명을 대상으로 ‘플렉스 소비 문화’에 대한 설문을 진행한 결과, 2030세대 52.1%가 플렉스 소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 1위는 ‘자기 만족이 중요해서’(52.6%, 복수응답)였다. 다음으로는 ‘즐기는 것도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해서’(43.2%), ‘스트레스 해소에 좋을 것 같아서’(34.8%),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 생각해서’(32.2%), ‘삶에 자극이 되어서’(22.2%)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중 54.5%는 앞으로 플렉스 소비를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며, 플렉스 하고 싶은것으로는 ‘고가의 명품’(40.8%, 복수응답), ‘세계여행’(36.7%), ‘음식’(27%), ‘자동차’(24.6%), ‘집·땅 등 부동산’(23.2%), ‘전자기기’(21.6%) 등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명품 정보를 얻을까. 빅데이터 컨설팅 컴퍼니 롯데멤버스의 ‘2019년 트렌드Y 리포트’에 따르면 이들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사회관계망서비스)(26.7%)를 통해 명품 정보를 얻는다. 

구매 채널 중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곳은 브랜드 매장(12.8%)인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해 할인을 거치지 않고 직영 매장을 통해 제값을 내고 구매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들보다 빨리 제품을 구매하면서 플렉스하는 기분을 내고, SNS를 통해 ‘인증샷’을 남기는 소비 형태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MZ세대’(밀레니얼 세대와 그보다 어린 Z세대를 합친 조어)는 실용성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힙합 문화인 플렉스가 이들에게 익숙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플렉스는 명품을 소비하는 성향만을 나타내는 것이라, 자기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인스타, 유튜브, 틱톡 등 다양한 SNS를 접하고, 자신을 찾기를 원하는 MZ세대의 니즈와 잘 맞아떨어지는 현상인 셈이다.

플렉스 해버리는 소비자는 전자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삼성 비스포크 냉장고, LG 시그니처, 삼성 무풍 큐브. /삼성전자 LG전자
플렉스 해버리는 소비자는 전자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삼성 비스포크 냉장고, LG 시그니처, 삼성 무풍 큐브. /삼성전자·LG전자

◇ 전자업계도 플렉스 열풍에 동참… 프리미엄 가전 전략 유지

플렉스 해버리는 소비자들은 전자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된 이베이코리아 조사 결과에서도 ‘비싸도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는 항목’으로 ‘디지털·가전’이 ‘패션·뷰티’와 함께 나란히 1위를 차지했다. ‘올해 꼭 사고 싶은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는 건조기·냉장고·의류관리기·노트북·TV·공기청정기·태블릿·청소기 등이 꼽혔다.

이전까지 전자업계에서 가전은 단순히 ‘한 번 사면 잘 안 바뀌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주력 상품은 세탁기·냉장고·에어컨 등에 국한됐다. 하지만 ‘비싸도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는 트렌드가 생기면서 가전 포트폴리오도 다변화되고 있다. 

국내 가전업계 투톱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생활가전, 특히 프리미엄 가전의 매출 증가세에 힘입어 올해도 프리미엄 전략을 선택했다. 양사는 QLED TV, OLED TV 등 프리미엄 TV의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기술 경쟁에 힘쓰고 있다.

또한 미세먼지 이슈와 함께 공기청정기 구매가 늘어났고, 예전에는 필수품이 아니었던 의류 건조기는 가정의 필수품이 돼가고 있다. LG전자가 선도했던 의류관리기(LG 스타일러·삼성 에어드레서)는 이제 젊은 층 사이에서 낯선 물건이 아니다. 불과 3~4년 전에는 해외직구로 구매했던 무선청소기는 이제 고가의 상품이라는 인식보다는 편한 필수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냉장고’는 다양한 색상, 형태 등을 선택할 수 있어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올해 출시한 삼성전자 ‘무풍 큐브 공기청정기’는 다양한 색상과 함께 인공지능(AI)도 적용돼 있어 첨단 기술에 익숙한 젊은 층을 공략했다. 

LG전자는 지난해 프리미엄 가전 라인인 LG 시그니처와 신가전(의류관리기·건조기 등) 등의 매출이 높아 생활가전 사업은 분기 최대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가전업계에서는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고려한 ‘틈새 가전’을 주목하고 있다. 가사 노동 시간을 줄이는 식기세척기, AI가 적용된 건조기(삼성 그랑데AI 등), 고가의 상품으로 여겨졌던 커피머신, 수제 맥주 제조기(LG 홈브루) 등도 이같은 제품군에 속한다. 

업계에서는 이같은 소비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선 MZ세대는 사소한 물건 하나를 구매하더라도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제품을 고르려고 한다. 게다가 단순히 있는 돈을 다 쓰는 탕진잼과는 달리, ‘플렉스하는 자린고비’라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하면 이런 현상이 ‘반짝 유행’으로 끝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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