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대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뉴시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대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호영 기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24일 퇴임했다. 2018년 9·2 전당대회를 통해 대표 직에 오른 지 541일 만이다.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지만, 당 대다수 세력이 손 대표에게 등을 돌린 상황을 감안하면 ‘꽤 오래 버텼다’는 평가다.

실제 손 대표는 지난해 4·3 보궐선거 실패 이후 ‘리더십 부재’ 논란에 휩싸여 약 10개월에 걸쳐 유승민계·안철수계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퇴진 요구를 받았다. 이들은 당시 손 대표를 상대로 ‘당비 대납’ 의혹 등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당비 대납’  의혹이 터지자 당 내에서는 이제 ‘손 대표의 정치생명은 끝’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17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조사 결과 위법 사항을 찾지 못했고, 사건은 자체 종결됐다.

올 초 두 세력의 구심점이자 바른미래당 창업주인 유승민·안철수 전 대표가 각기 다른 당(새로운보수당·국민의당)을 차려 바른미래당을 떠났다. 이후 손 대표는 기존 당권파와 호남계의 거센 ‘2차 퇴진 압박’에 시달렸다.

4·15 총선을 코앞에 두고도 손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최고위원들의 계속되는 보이콧으로 당무는 진척이 없었다. 손 대표는 최고위원회 가동을 위해 지난 4일 당 지도부를 원외 인사들로 교체하는 고육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측근 이찬열 의원이 탈당했다. 20석을 유지하던 의석이 19석으로 줄어 교섭단체 지위마저 잃었다.

손 대표가 접촉해왔던 미래세대와 통합 논의가 지체되고, 대표 거취 문제로 당이 장기 표류 양상을 띠자 김성식·김관영 의원도 탈당 대열에 동참했다. 손 대표는 부랴부랴 대안신당·민주평화당과 합당 테이블을 꾸렸으나, 정작 ‘자신의 퇴진’이 합당 논의의 대전제였다.

그러나 손 대표는 사퇴 요구를 거듭 일축했다. 손 대표는 12일 최고위 직후 기자들과 만나 “3당 통합과 손학규의 거취가 무슨 상관이냐”며 “통합이 ‘당 대표 물러나라’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14일 최고위에서도 "호남신당 창당은 결코 새로운 길이 될 수 없다. 우리 정치가 구태로 회귀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같은 손 대표의 ‘대표 직 수성(守城)’노력은 마치 중국 고전 『삼국지』에서, 228년 대규모 북벌에 나선 촉나라 재상 제갈량의 숱한 공격에도 진창(陳創)성을 지켜낸 위나라 장군 학소(郝昭)를 연상케 한다.

『정사 삼국지』·『위략』 등에 따르면, 당시 진창성을 포위한 제갈량의 병력은 수 만에 달했고, 학소는 1천 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제갈량이 진창성 함락을 위해 정란·운제·충차 등 공성병기를 총동원하고, 참호를 메우거나 땅굴을 파는 등 갖가지 전략·전술을 펼쳤으나, 학소의 철벽 방어망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학소는 제갈량의 대규모 공격을 20여 일 견뎌냈고, 마침내 위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제갈량은 별 수 없이 퇴각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학소를 수도로 불러 공을 치하하고 열후(列侯)에 봉했다.

반면 손 대표는 학소와 달리 대표 직 수성에는 실패했다.

손 대표는 ‘실체 논란’을 일으켰던 미래세대와 통합을 어떻게든 마치고, 최소한 바른미래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낸 상태에서 '명예로운 퇴진'을 기대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당 대부분 세력의 거센 반발에 등 떠밀려 초라하게 떠나는 모양새가 됐다.

미래통합당에 사실상 흡수된 유승민계와 일부 안철수계, 미래통합당과 ‘반문(反文)연대’ 가능성을 열어둔 국민의당을 감안할 때, 손 대표가 단순 대표 직 수성이 아니라 큰 틀에서 바른미래당을 수성했다는 평가도 있다.

손 대표가 자칫 보수진영에 쉽게 편입될 뻔한 당을 지켜, ‘제3지대’의 명맥을 이어갈 기회를 마련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박주선 바른미래당 대통합추진위원장은 20일 “손 대표는 바른미래당이 공중분해되기 전까지 모든 수모와 굴욕을 참아가며 (과거) ‘국민의당’의 가치를 지키려 최선을 다했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손 대표의 단기필마·정면돌파 식 농성은 투박했다. 우선 “정치 세대교체는 내가 이뤄야 한다”는 자의식이 지나쳤다. 이는 소속 의원들이 18일 ‘셀프 제명’을 시도한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창당 때만 해도 30석이었던 의석은 셀프 제명 사태 및 안철수계 권은희 의원의 추가 탈당 뒤 8석까지 쪼그라들었다.

또 “추석까지 당 지지율 10% 미만 시 사퇴” “안철수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 “미래세대는 당을 접수하라” 등 경솔한 발언들 역시 임기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얄궂게도 그 사이 손 대표는 총선 대비 어떠한 가시적 성과도 내지 못했다. ‘제3지대 꿈’은 자연스럽게 ‘노욕’으로 비춰졌다. 손 대표가 무슨 발언을 해도 당 지도부조차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제갈량의 다채로운 공격을 시의적절한 대비로 무력화시킨 학소의 대응과 대비된다. 손 대표의 자진사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또 손 대표는 학소 입장에서 ‘구원군’과 같은, ‘미래세대’와 통합 논의에서 결과물은커녕 역효과만 초래했다. 손 대표는 사퇴 입장을 밝힌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접촉하던 미래세대가) 지나친 요구를 해와서 통합 작업이 결렬됐다”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결과적으로 바른미래당의 학소(손 대표)는, 진창성(바른미래당)이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했다. 대표 직을 내려놓은 손 대표는 평당원으로서 활동할 예정이다. 통상적으로 성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 성주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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