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동무’가 사라진 게 속상합니다. 이 예쁜 말이 사라지고, ‘친구(親舊)’라는 한자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아쉽습니다. 60여 년 전 초등학교(국민학교) 초년일 때는 친구는 없고 동무만 있었습니다. 한동네 앞뒷집 동갑내기들은 동무였지 친구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1학년 1학기 국어책 맨 앞에도 “철수와 영희는 동무입니다”라고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동무 대신 친구라고 하면 어른들이 “친구는 어른들이 쓰는 말이고, 아이들은 동무라고 하는 거다”라고 고쳐주던 기억도 있습니다. 동무 사이에는 가로막는 게 없지만, 친구 사이에는 더 좁힐 수 없는 무엇-아주 작고 사소한 이해타산 같은 것-이 있다는 가르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무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말인지는 동요 ‘동무들아 오너라’를 가만히 불러보면 느껴집니다. ‘친구들아 오너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친구로는 동무에 담긴 밝고 환하고 순수한 느낌이 표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부터 이 좋은 말, 아름다운 말, 동무가 친구로 바뀌더니 이제는 동요나 60~70년 전 세태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됐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누구나 서로 동무라고 부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바이 동무, 오마니 동무, 철수 동무, 영희 동무….

그때 동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네 친구가 누구냐” 대신 “네 동무가 누구냐”는 말이 더 오래 쓰였더라면, 나는 지금보다는 약간이라도 더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초등학교 아이들도 “친구와 논다”고 하지 않고 “동무와 논다”고 말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순수하고 귀엽게 자라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실생활에서 사용됐더라면 사회의 품격이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되는 단어도 있습니다. ‘개결(介潔)’입니다. 한자말이지만 ‘성품이 깨끗하고 굳다’라는 뜻과, 발음이 깔끔해서 좋아합니다.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1896~1989)의 수필 ‘딸깍발이’처럼, 선비의 삶을 다룬 글이나 소설에서 간혹 읽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이 어휘를 대화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합니다.

잘 아는 학자들인데, 나도 끼어 셋이 만난 자리에서 둘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가 “그 어른 참 개결하신 분이지”라고 하니까, 다른 하나가 “암 개결하시고말고. 대단하신 분이지”라고 받았습니다. 개결을 음성으로 들은 게 처음이라 신기해서 내가 “개결…”이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둘 중 누군가가 내가 뜻을 모르는 줄 알고 “성품이 깨끗하다는 말일세”라고 하고는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단어를 들은 적도, 내 입에 올린 적도 없습니다. 개결한 사람이 드물어서 안 쓰이는 건지, 개결한 사람을 인정하기 싫은 나머지 주변에서 그렇게 불러주지 않아 못 듣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개결하지 못해 가까이에 있는 개결한 분들을 보지 못하는가 자문도 해봅니다. “만약 고상(高尙)이나 개결이라는 이름만을 사모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 보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는 가르침이 있긴 하지만 개결한 분이 있어야 어둡고 답답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듯하다’라는 말도 비슷한 처지가 된 단어입니다.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바르다’라는 뜻입니다. 개결과 비슷하지만,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저 집 맏사위는 개결하다”고 하면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나, “저 집 맏사위는 반듯하지”라고 하면 가까이 사귀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자라면서 몇 번 듣기도 한 “반듯하다”는 말은 오래전 대선에서 한 후보가 “반듯한 나라를 만들어보겠습니다”라고 외친 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반듯한 나라가 된 건 절대 아닌데 말입니다.

듣고 싶은 말, 자주 사용하고 싶은 말이 또 있습니다. 단어가 아니라 문장, ‘늘인 말’입니다. 옛 직장 선배가 카톡으로 난센스 퀴즈를 여러 개 보냈는데 하나도 못 맞히니까 “바다의 보배”라고 남기고 끊었습니다. “좋은 말을 들을 처지가 아닌데, 왜 보배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바다의 보배는 바보라는 말이라고. 이 바다의 보배야”라고 합니다. 허물없는 사이지만 바보라고 하면 혹여 상대의 마음이 다칠까봐 이렇게 말한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개씩 나오는, 품위 없이 ‘줄인 말’ 유행어보다는 이렇게 점잖은 유행어, ‘늘인 말’ 유행어 가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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