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내가 사는 아파트는 20층이다. 한 층에 두 집씩 40집이 사는 이 아파트에서 나는, 내 아내는 교양 없고 막 돼먹은 나쁜 이웃이다. 최소한 세 가구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게 확실하다.

먼저 나. 봄비가 제법 세차던 며칠 전 새벽 6시쯤, 개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놈은 창가에 깔아놓은 대소변 패드는 ‘개무시’하고, 바깥에서 오줌을 싸지 않으면 집 아무데나 갈겨놓는, 더럽게 ‘특수한’ 놈이다. 그러니 귀찮아도 하루 3~4번 데리고 나가는 게 내 정신 건강에 낫다. 거실이나 부엌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이놈이 갈겨놓은 한강수 같은 그 노랑 액체를 휴지 반 롤 이상을 들여 처리하려면 욕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1층 자동문이 열린 뒤에야 비가 오는 걸 알았다. 이놈도 비 맞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지라, 어서 끌고 올라가 화장실에서 오줌을 싸도록 하려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서 ‘주르룩’이다. 욕 한 번 해주고, 주머니에서 휴지(개 산책시킬 때 필수품)를 꺼내 덮었다. 접은 휴지가 제법 도톰했는데도 금세 노랗게 변했다. 올라가서 비닐장갑과 휴지를 더 가져오려는데, 자동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다 누르기 전에 내가, 교양 있다고 생각해온 사람답게, 센서에 손짓해서 자동문을 열어줬다. 빗물이 줄줄 떨어지는 우산을 든 내 또래의 영감이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날 보고, 개 보고, 노랗게 변한 휴지를 보고, 또 나를 본다. “더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개도 자기에게 ‘적의’를 발산하는 그와 엘리베이터 타기가 싫었는지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나도 개 따라 발을 옮기는데, 그 자가 “이거 치워야지, 이거 어떻게 하려고!”라면서 혐오감 가득한 눈길로 내 몸 아래위를 훑는다. “치울 거요”라고 대답하고 올라가는 내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내려가 비닐장갑을 끼고 개 오줌을 치우는데, 그 영감에게 화가 치밀려고 했다. “이거 치우려면 번거롭겠네요”라고 해도 자기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이고, 나는 그 말 속에 담긴 배려를 감사했을 텐데….

다음은 아내. 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베란다 바깥 에어컨 실외기 위에 둔 화분에 물을 주던 아내가 창밖으로 몸을 빼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그 시각아래층 바로 그 자리에서 실외기를 설치하고 있던 ○○전자 기사. 그는 느닷없이 위에서 물이 떨어지자 고개를 내밀고는 아내를 향해 “물을 뿌리면 어떻게 해요?”라고 다짜고짜 짜증을 부렸던 모양이다. 느닷없었던 건 아내도 마찬가지. 갑자기 튀어나와 목소리 높여 따지고 드니, 놀라기도 한 아내는 그냥 미안하다고 하기가 억울했던지, “물을 맞았으니 미안한데, 사람이 있는 걸 어떻게 알겠냐, 내가 일부러 그랬냐?”라고 사과에 가시를 박아 보냈다. 아내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 기사는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말씀에 왜 꼬리를 붙이냐?”고 아내에게 다시 대들고.

옥신각신이 계속되자 제3자가 개입했다. 아래층 여자가 “아이 참으세요. 우리도 그동안 피해를 많이 봤어요”라고 기사를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아내를 말려서 일요일 오후의 말싸움은 거기서 끝났는데, “우리도 그동안 피해를 많이 봤어요”라는 말이 참 희한해 지금도 반성중이다. 우리 때문에 아래층이 무슨 피해를 봤을까? 간혹 오는 손녀들이 층간소음을 냈단 말인가? 오디오 소리가 너무 컸나? 내가 개에게 욕하는 소리를 들었나? 아내는 아래층 여자를 만나면 “무슨 피해를 보셨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물어보겠다는데, 정말 그렇게 물어본다면 우리는 이제 완전히 나쁜 이웃으로 찍힐 일만 남았다. “그런 말한 적 없다”고 잡아떼면 증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게 되고, “그걸 꼭 말해줘야만 아시겠어요?”라고 목청을 높이면 아내도 만만치 않은 목소리로 응전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나. 골초가 몇 사람 있다. 거의 40대 젊은 가장들이다. 새벽이나 늦은 밤, 화단 옆에서 연기를 내뿜는 그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고민을 많이 짊어진 것처럼 보여서다. 그들에게 속으로 욕을 할 때도 많다. 자동문 바로 앞에 담배꽁초와 담뱃갑이 버려져 있을 때다. ‘담배 터(화단 옆)’까지 몇 걸음 걷는 게 귀찮아서 현관 자동문 앞에서 피우곤 꽁초와 담뱃갑을 버리는 교양 없는 골초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에 개를 데리고 나갔더니, 담배 터에서 한 젊은 골초가 한숨 쉬듯 연기를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개를 끌고 들어오는 내 뒤를 담배를 다 피운 그가 따라왔다. 자동문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바로 앞에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나는 담배꽁초를 한쪽으로 차버렸다. “골초들아 여기서는 피지 마라”라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행동은 꽁초를 버린 장본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그에게 ‘공범 혐의’를 덮어씌우고 적의를 드러낸 거였다. “영감님, 그 꽁초 내가 버렸나요? 왜 그러세요?”라고 따지고 들면 아무 말 못하고 낭패를 볼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나를 나쁜 이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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