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K로 시작되는 영어 단어는 2만3,442개입니다. ‘Free Dictionary’라는 사이트에서 알아냈습니다. K로 끝나는 단어는 1만1,946개라고 나오는군요.

영어 사전에 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K로 시작되는 영어 단어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K의 나라 ‘Korea’에서 K로 시작되는 단어-‘K워드’라고 부르고 싶은-를 급속히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K팝, K푸드, K뷰티, K컬처, K방역, K돌봄, K바이오, K레이싱, K좀비, K스릴러, K스타트업, K문화유산, K진단키드, K영어, K라이프스타일, K패션, K웹툰, K배송, K아트, K엔터테인먼트….

범람하는 K의 물결에 나도 하나 만들어 보태고 싶어졌습니다. ‘K노멀’입니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뉴노멀’을 본뜬 겁니다. 뉴노멀은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떠오른 기준 또는 표준’을 뜻합니다. 조국 사태와 윤미향 사태를 겪은 한국인의 삶에도 새로운 기준이 생겨났습니다. 이 새 기준은 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과 다르고, 한국에만 있으니 K노멀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겁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뉴노멀에 온라인 강의, 온라인 예배, 온라인 쇼핑, 온라인 콘서트, 온라인 회의(화상회의), 무관중 경기 같은 다양한 현상이 있듯이 K노멀에도 다양한 현상이 있습니다. 적반하장, 내로남불, 비(非)양심, 합의 무시, 타협 불인정, 부정, 탐욕, 제 식구 챙기기, 절제 없는 권력 행사, 음모론, 이성보다는 감성 우선, 설득보다는 선동, 거짓말, 뻔뻔스러움 등등입니다.

코로나19의 뉴노멀의 핵심이 ‘비접촉 대면(언택트)’이라면 K노멀의 핵심은 ‘도덕 붕괴’ 혹은 ‘윤리의식 마비’입니다. 둘 다 미래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겠지만, 뉴노멀보다는 K노멀을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K노멀이 확산되는 걸 막지 않으면, 조국과 윤미향 사태를 겪으면서 본 것처럼 여태 우리가 옳다고 믿어온 것이 틀린 것이 되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는 게 바람직한 삶이 되는, 가치가 전도된 세상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은 부패한 자, 사악한 자, 거짓말쟁이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입니다.

K노멀의 문제점은 ‘시대의 논객’ 진중권이 ‘김대중·노무현 연설에는 있고 문(文)대통령 연설에는 없는 그것’이라는 제목으로 며칠 전 한국일보에 쓴 칼럼에서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대통령은 ‘기준’을 정해주는 행위로써 국가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대통령은 남에게 내준 채 윤리를 포기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이 망가지자, 인사청문회라는 의회의 윤리 감시기능마저 무력화됐다.

당에서 위성정당의 꼼수로 스스로 약속한 ‘정치개혁’의 대의를 파괴해도 대통령의 윤리적 개입은 없었다. 이 중대한 사안을 놓고 의원들 사이에 토론조차 없었다. 통치의 철학은 양정철의 손에 들린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로 대체됐다. 노무현이라면 당장 윤리적 개입을 해 당에 ‘원칙 있는 패배’를 주문했을 것이다. 그에겐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제 개혁이 우리가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개혁이다.”

철학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원래 공화국은 ‘공무’(res publica)를 뜻한다. 그런데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은 사적 감정의 표현으로,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야 할 대통령이 윤리적 판단의 영역을 없애고, 그 공백을 ‘내 식구’ 철학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그렇게 친문세력의 사화국(res privata)이 되어갔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여성혐오 발언으로 비난받는 이를 청와대로 부른다. 공동선의 표상이어야 할 공화국 대통령이 제 식구 챙기는 가장으로 행동한다. 그 식구들도 똑같다. 선거개입까지 해가며 아버지의 친구를 챙긴다. 윤리의 영역을 치워버린 것으로도 모자랐나? 최근에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까지 흔들고 있다. 검찰총장을 공격하고, 확정된 판결을 뒤집으려 든다. 이렇게 국가의 정의는 무너져간다.>

한마디로, K노멀이 한국사회를 칭칭 감음으로써 한국에서 정의는 사라지고 상식은 무너지게 됐다는 겁니다. 대통령과 측근이 K노멀 확산에 앞장섬으로써 한국은 더 자라기는커녕 말라죽기만 기다리는 나무가 됐다는 겁니다.

‘K방역’이 나름 성공한 듯 보이자 한국이야말로 선진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K노멀이 사라지지 않으면 한국은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K를 붙여 K선진국이라고 부를 것을 그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만일에, 영어사전에 K노멀이나 K선진국 같은 말이 실리게 되면 우리 얼굴이나 가슴에 K자를 큼직하게 새겨 넣은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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