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부분일세. 중학교 때 저 소설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노란 동백꽃’이었네. 노란 꽃이 피는 동백꽃이라니? 동백꽃에서 ‘알싸한’ 향기가 났나? 강원도 춘천 출신인 김유정이 다른 꽃을 동백꽃으로 잘못 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

10여 년 전부터 꽃 사진을 찍으면서 알았네. 김유정이 말한 동백꽃은 남쪽지방에서 흔히 보는 동백나무의 붉은 꽃이 아니고 생강나무 꽃이라는 것을. 산지의 계곡이나 숲 속의 냇가에서 쉽게 자라는 생강나무는 보통 3월에 노란색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데, 가지나 잎을 자르면 우리가 먹는 생강의 ‘알싸한’ 냄새가 나서 이름이 '생강나무'야. 강원도 산골에서는 생강나무의 열매에서 얻은 기름을 동백기름 대신 아녀자들의 머릿기름으로 사용해서 동백나무라고 불렀다네. 김유정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노란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이야.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관 마당에 생강나무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지.

나는 생강나무 꽃을 볼 때마다 몇 년 전 대청호에 있는 청남대에서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들었던 두 도시 아낙들의 대화가 생각나 혼자 웃곤 하네. '우리가 먹는 생강의 나무가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지나가더군. 저건 먹는 생강나무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잘못하면 잘난 척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그냥 지나쳤었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꽃이 좋아서 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네. 올해는 여느 해보다 나무 꽃들이 일찍 피었다가 졌어. 게다가 많은 나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꽃을 피웠지.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왕벚나무, 백목련, 황매화, 앵두나무, 자두나무, 산벚나무 등 보통 4월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마치 순위 다툼을 하듯 며칠 사이에 피었다가 져버렸네. 다양한 꽃들을 한꺼번에 봐서 좋았겠다고? 아니야. 걱정이 되었어. 기후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는 식물들의 신음소리를 꽃을 통해서 직접 들을 수 있었거든.

지난 6월 29일에 <한겨레>에 실린 국립수목원의 ‘기후변화와 한국산림의 식물계절 지난 10년간의 기록’보고서는 꽃 사진 찍으면서 내가 했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수치로 확인시켜주고 있네. 지난 10년간 이 땅에 살고 있는 식물들의 생태시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를 과학적으로 조사했거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지는 것 같은 봄여름에 나타나는 변화는 빨라지고, 단풍이나 낙엽 등 가을에 나타나는 변화는 늦어지는 경향을 확인시켜 주었어.

보고서에 나오는 낙엽활엽수들 중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나무가 생강나무였네. 잎눈이 조직을 뚫고 나오는 잎눈 파열은 12.8일, 온전한 잎이 열리는 개엽 시기는 13.8일, 꽃눈이 나오는 꽃눈 파열은 45.8일, 꽃이 피기 시작하는 날은 25.5일, 꽃이 활짝 피는 시기는 17.8일, 꽃이 지는 날은 14.8일이 빨라진 반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은 8.2일, 잎이 떨어지는 날은 3일 늦어졌네. 3월 초에 동네 야산에서 생강나무 꽃을 보고 너무 일찍 왔다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내년에는 더 일찍 볼 수도 있다고 해도 전혀 반갑지 않네.

식물들의 생태시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은 기후온난화 때문이야. 한반도 기온, 특히 봄 기온이 100년 전보다 2~3도 올라가니 식물들도 고생하고 있는 거지. 식물들이 힘들면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도 함께 고생할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폭염과 가뭄 같은 이상기후가 잦으면 모든 생태계가 함께 무너지는 대참사를 당할 수도 있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코로나19도 생태계 질서가 교란되면서 생긴 역병이라는 걸 이제 누구나 알지.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야. 코로나19 백신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기후온난화 때문에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작년까지 우리가 누렸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후위기를 막거나 늦출 수 있는 조치들을 빨리 취해야 하는데 아직도 많은 나라들이 경제성장의 환상만 쫓고 있으니 답답해. 그나마 유럽에서 기후변화와 탄소중립 등의 환경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녹색당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니 천만다행이야. 우리는 언제쯤 경제 성장보다는 기후위기를 주요 의제로 제기하는 녹색당 의원들을 국회에서 만날 수 있을지……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말하지. 꼭 그렇게 되길 바라네. 코로나 이후에는 좀 더 생태중심적인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 더 이상 산과 강을 죽이는 토목 공사는 그만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3월이 아닌 4월이어야 노란 생강나무 꽃과 붉은 진달래꽃을 볼 수 있는 나라로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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