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2018년 4월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자리로 다가가고 있다. /뉴시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10일 대미담화를 통해 북미정상회담 연내 개최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이 담화에는 회담 성사의 여지도 담겨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김 제1부부장이 2018년 4월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자리로 다가가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10일 처음으로 대미(對美) 메시지를 냈다. 이 담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올해 북미정상회담은 없다’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에 대한 북한의 유화적 태도와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일말의 여지가 남아 있다. 

◇ 북미회담 일축하면서도 ‘김정은 결심’ 여지 남겨

김 제1부부장은 이날 오전 담화에서 “조미수뇌회담(북미정상회담)이 누구의 말대로 꼭 필요하다면 미국측에서 필요한 것이지 우리에게는 전혀 비실리적이며 무익하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미국의 북미정상회담 요청을 미국 국내 정치용이라고 판단함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북미정상회담이 연내 이뤄질 경우 “미국은 우리 지도부와의 계속되는 대화만으로도 안도감을 가지게 돼 있고 또 다시 수뇌들 사이의 친분관계를 내세워 담보되는 안전한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거둬들일 그 어떤 성과도 없으며 기대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꺼내들기 전에는 북한이 얻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같은 의중은 “우리는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지 못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행동과 병행해 타방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조치들이 동시에 취해져야만 가능하다”는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또 이 대목에서 김 제1부부장은 ‘타방(미국)의 불가역적 중대조치’라는 전제조건을 달긴 했지만 비핵화 의지도 명시적으로 확인했다. 2인자로 여겨지는 김 제1부부장의 공개적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김 제1부부장은 북미정상회담의 개최 여지를 남겨뒀다. 이 여지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두 수뇌의 판단과 결심에 따라 어떤 일이 돌연 일어날지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 등의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연내 북미정상회담은 사실상 거부하면서도, 최종 결정권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김 제1부부장은 또한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지난해 2월 ‘하노이 노딜’ 때의 ‘영변 폐기-일부 제재 해제’ 카드는 받지 않을 것임을 피력했다. 김 제1부부장은 지난해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을 언급하며 “그 이후 우리는 제재 해제 문제를 미국과의 협상 의제에서 완전 줴던져버렸다(내던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핵화 조치 대 제재 해제’라는 지난 기간 조미협상의 기본 주제가 이제는 ‘적대시 철회 대 조미협상 재개’의 틀로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진척되지 않고 있는 북미협상의 틀을 복원해 다시 대화를 시도하자는 의미로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판문점 회동 당시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하고 왔던 북측 인사들. 왼쪽부터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 김여정 제1부부장, 리용호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장금철 통일전선부장. /뉴시스
김 제1부부장은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어조는 대남 비난 담화에 비해 비교적 유화적이었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판문점 회동 당시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하고 왔던 북측 인사들. 왼쪽부터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 김여정 제1부부장, 리용호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장금철 통일전선부장. /뉴시스

◇ 미국에 대한 유화적 어조와 ‘DVD 소장’ 의지

김 제1부부장은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은 일축했지만, 어조는 대남 비난 담화에 비해 절제된 언사를 보였다. 미국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북미대화를 제의한다고 비판했지만, 지난달 17일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한 ‘요사스러운 말장난’, ‘뻔뻔함과 추악함’ 등의 말 폭탄에 비해서는 매우 ‘톤 다운’된 어조였다.

막말성 대미 비난은 자제했지만 “경제적 압박이나 군사적 위협 같은 쓸데없는 일에만 집념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위험한 행동에 나선다면 잠자는 범을 건드리는 격이 될 것이며 결과가 재미없을 것”이라는 비교적 날 선 경고를 쏟아냈다.

또한 김 제1부부장은 공식 직함을 사용한 담화로는 이례적으로,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 DVD를 얻고 싶다는 개인적 소회를 밝혔다. 그는 “가능하다면 앞으로 (미국)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 한다는데 대하여 위원장 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김 제1부부장이 미국 방송을 모니터 한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DVD 소장 의사까지 밝힌 것은 북한 체제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은 미국과 남한 등 ‘자본주의 퇴폐 사조’를 금기시하며 이를 전파하는 DVD 등을 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김 제1부부장의 첫 대미 메시지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호의적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아울러 대남 담당이었던 김 제1부부장의 첫 대미 메시지는 북한 내 2인자의 위상을 과시하는 동시에 외교무대에서 김 위원장과의 역할 분담을 시사했다.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을 일축하면서도 김 위원장이 기존 입장을 번복할 수 있다는 여지를 드러냈다. 

김 제1부부장은 악역을, 김 위원장은 회담을 열어갈 해결사를 맡은 것이다. 지난달 탈북민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김 제1부부장은 대남 도발을 주도했고, 김 위원장은 당 중앙군사위 예비회의를 통해 강경 군사계획을 막판에 보류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역할분담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