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3 17:27
[정숭호의 늦은수다] 윗물, 아랫물 모두 더럽구나
[정숭호의 늦은수다] 윗물, 아랫물 모두 더럽구나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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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박원순 시장 장례식을 왜 서울시가 주관하느냐를 두고 오고간 설왕설래와 고담준론이 넘치던 지난 주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고 날카롭고 시원하게 해준 분들의 글을 읽으며 내 글에 쓸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데 “ATM 위 70만원 가져간 범인, 잡고 보니 부천시의회 의장”이라는 뉴스가 떴습니다. 이건 또 뭐냐? 눈길이 안 갈 수 없었습니다.

“지난 3월 24일 오전 A씨는 경기도 부천시 상동의 한 은행을 찾았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70만원을 인출한 A씨는 현금을 그대로 두고 은행을 떠났다. 뒤늦게 돈을 두고 온 걸 안 그는 다시 은행으로 갔지만 돈은 이미 사라졌다.

경찰은 은행 내 현금인출기 CCTV 영상을 분석, 용의자를 검거했다. 이동현 경기도 부천시의회 의장이었다. 이 의장은 경찰 조사에서 ‘당시 술을 마신 상태였다. 은행 현금인출기를 찾은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CCTV 영상 등을 확인한 뒤엔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절도 혐의를 적용해 이 의장을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7억원, 70억원이면 모를까 고작 70만원을 쓱싹한 ‘의장님’, 범행이 들통나자 돈을 가져 간 게 오전인데도 “당시 술을 마셔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은 ‘의장님’, CCTV 영상이라는 꼼짝 못할 물증을 들이대자 범행을 시인한 ‘의장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궁금해 찾아봤더니 이 양반, 경찰에 붙잡히기 사흘 전인 지난 8일 경기도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과 ‘의장 취임 기념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나는 의회를 이렇게 끌어가겠다”는 자기 포부를 밝히는 이런 인터뷰는 내용이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게 태반이라 보통 제목만 훑어보고 넘어가는데, 70만원을 훔친 의장님의 인터뷰라 다 읽어봤습니다. 가관이자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제8대 부천시의회 후반기를 이끌어 갈 이동현 의장(50)은 “시의원 3선 동안에 축적한 의정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소통·협력·협치’라는 시대적 명령과 ‘감시·견제·균형’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조화롭게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의장은 시민 참여와 소통을 통한 열린 의회 구현과 시민 화합과 공동체 의식 강화 최선, 미래를 위한 투자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의정 역량 집중, 균형적인 견제와 감시 강화, 의원들의 의정활동 지원 및 연구단체 활성화, 지방분권과 지방자치법 개정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4층 의장 접견실을 의원 전체에게 개방하여 접견과 소통공간, 의원과 집행부가 시정 정보 공유와 의견 교류의 의정활동 거버넌스 구축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특히 이 의장은 “젊은 감각, 역동적인 리더십으로 집행부와 상생하고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며, 균형과 안전을 실현하는 의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번지르르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좋은 말은 다 들어있습니다. 몇 글자만 고치면 부천시의회 의장이 아니라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특별시, 광역시, 도지사님 같은 분들이 한 말씀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입니다. 이 인터뷰를 할 때, 이 화려하고 비전 넘치는 말씀을 할 때, 상생과 협치와 혁신을 이야기 할 때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70만원을 훔쳤다는 양심의 가책(呵責)이 그때 그 마음속에 있었는지, 범행이 사흘 뒤에 들통 난 것처럼 경찰이 자기를 곧 찾아낼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만일에 잡히지 않았더라면 그의 정치적 미래는 어떻게 펼쳐졌을까도 궁금했습니다.

전국에는 226개 기초단체가 있습니다. 단체장과 의장을 더 하면 452명 중 하나입니다. 숫자가 많으니 이런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도둑질 의장님’을 접하고 보니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해로운 독초 한 가닥이 일찍 뽑힌 게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도 도둑질 같은 걸로 걸리지 않고 정치적 전문분야를, 환경이든 성평등이든, 상생이든, 하나를 잘 고르고 좋은 말과 글로 포장을 잘 해 몸집을 키웠더라면 맑은 정신의 소유자, 시대의 등불 같은 찬사를 받았을 겁니다.

더러운 윗물이 아랫물을 더럽게 하는지, 아랫물이 더러워 윗물이 더러워진 건지 따지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다 썩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