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위패와 영정이 지난 13일 오후 경남 창녕군 장마면 인근 박 시장의 생가에 도착해 장지인 선친묘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위패와 영정이 지난 13일 오후 경남 창녕군 장마면 인근 박 시장의 생가에 도착해 장지인 선친묘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호영 기자  2년 전 경기도의 한 대학 재학생 3명으로부터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A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A 교수는) 학과에서 왕이나 다름 없었다”며 A 교수로부터 상습 성희롱 및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대학 측이 진상조사에 나서자 A 교수는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휴대전화에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짤막한 메모 만을 남겼다. 대학 측은 “고인이 교육자로서 의혹에 대해 극심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며 조사를 중단했다.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사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릴 새도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정황을 잘 아는 학계 관계자는 “당시 (미투 제기) 학생들이 교수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식의 불쾌한 소문이 떠돌았다. 학생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해당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도 학생들을 매도하는 댓글이 달렸다. 이른바 2차 가해다.

최근 나라를 들썩이게 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도 위 사례와 닮아 있다.

박 시장은 전 비서였던 B씨에 의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지 하루 만인 지난 9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서울특별시장(葬)이 논의됐다. 성추행 의혹 규명도 전에 박 시장을 기리자는 취지의 국가장을 치르는 것 자체가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하지만 박 시장의 장례는 서울시 주관 5일장으로 치러졌다.

여당은 박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줄지어 애도를 표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박 시장을 “순수하고 부끄럼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민주당은 ‘님(박 시장)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추모 현수막을 서울 곳곳에 달았다. 일각에선 “도대체 뭘 기억하겠다는 거냐”는 비아냥이 나왔다.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박 시장은) 누구보다도 성인지감수성이 높은 분”이라며 “고인이 죽음을 통해 주는 숨은 유지는 미투 의혹으로 고소됐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럽고 사과한다, 더는 고소 내용의 진위 공방을 통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지 말라'가 아닐까”라고 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피의자가 사망한 만큼 B씨의 고소는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에 송치될 것으로 관측된다. 야권에서 박 시장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지만, 여권 및 고정 지지층 중심의 박 시장 추모 분위기 속 B씨만 2차 가해에 무방비 노출된 모습이다.

B씨가 나경원 전 통합당 의원의 비서 출신이라는 가짜뉴스부터 무차별적 신상털기·비난이 이뤄졌다. 한 네티즌은 “관노와 수 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난중일기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하나”라는 글을 한 커뮤니티에 올려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급기야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박 시장 때문에 ‘피해자’에서 졸지에 ‘피해 호소자’로 지위를 변경 당한 수많은 성추행 피해자들의 옆”이라며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도 앞으로 피해 호소자 중심주의로 이름이 바뀔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금희 통합당 의원은 성범죄 혐의를 받는 피고소인이 사망한 경우 절차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 추진에 나섰다. 피고소인의 극단 선택 후에도 사건의 진상을 밝혀 피해자를 2차 가해에서 보호하자는 취지다.

관련 법 개정과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미투→극단 선택→2차 가해로 이어지는 2년 전 그리고 오늘날의 슬픈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사회 지도층의 성인지감수성 개선과 보다 철저한 책임 의식이다.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피해자를 비롯해 남겨진 주변인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2년 전 A 교수 사건을 근거리에서 지켜봤던 관계자는 박 시장 사건 관련 질문에 “처벌받을 행동을 했으면 사과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 사실관계가 밝혀지기도 전에 죽음을 택하는 건 공인으로서 더 없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면서 “지금 상황을 보면 박 시장이 한 여자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은 사람도 명예롭지 못한 데다 피해자에게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것”이라고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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