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요즘 한국에서 기분 좋은 사람 100명을 뽑는다면 왕년의 축구 국가대표 선수 안정환이 반드시 포함될 거다. 한여름이 됐는데도 가라앉지 않는 코로나, 폭삭 주저앉은 경기, 미친 듯 날뛰는 부동산, 억지와 막말만 내뱉는 정치꾼들, 자기 ‘명을 거역한 사람’과 그를 감싸는 사람들을 향한 ‘장관’의 표독한 눈빛, ‘마음이 맑은 시장님’의 성추행 의혹, 성추행 의혹 피해자에 대한 터무니없는 2차 가해… 이 모든 것들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와 저소득 일용직 근로자 등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기분 좋은 사람이 100명이나 될 리 없으니 10명쯤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도 그 안에는 반드시 안정환이 포함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 그가 이끄는 축구팀 ‘어쩌다 FC’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FC’는 JTBC의 일요일 밤 예능 ‘뭉쳐야 찬다’에서만 축구를 한다. 프로그램 선전에 앞장선다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설명을 좀 해야겠다.

‘어쩌다 FC’의 선수진은 전 천하장사 이만기, 서울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김재엽, 농구대통령 허재, 기록의 사나이 양준혁(야구), 도마의 신 여홍철(체조), 유에스오픈 16강 이형택(테니스), 스턴건 김동현(격투기), 메이저 리그 우승 투수 김병현(야구), 2미터의 사나이 김요한(배구), 모터범 모태범(빙상), 마린보이 박태환(수영), 영원한 랭킹 1위 이대훈(태권도) 등이다. 모두 한국 스포츠를 빛낸 별들의 별이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여기에 마라톤의 이봉주, 레슬링의 심권호, 사격의 진종오 등 ‘어쩌다 FC’를 거쳤거나, 잠시 쉬고 있는 별들을 포함하면 면모는 더욱 화려해진다. 또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한두 번씩 출연한 ‘전설’도 많다. 농구 이충희, 야구 이종범, 배구 신진식, 유도 조준호, 스켈레톤 윤성빈, 허재의 아들인 농구선수 허훈 등등이다. 안정환과 함께 뛰었던 국가대표 축구선수 황선홍 유상철 설기현 이동국은 일일 코치로 나왔다.

안정환은 1년 전쯤 이 ‘별’들을 데리고 ‘버젓한 조기 축구팀’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맡았다. 예능 프로니까 재미도 있어야 했다. 이 역할은 명 MC라는 김성주와 개그맨 김용만과 정형돈이 맡았다. 방영시간은 두 시간. 첫 한 시간은 말장난과 개인기, 노래 등 예능에 치중하고, 나중 한 시간에는 축구 기술과 전술 훈련을 한 후 실전을 펼친다. 상대는 대부분 전국의 이름난 조기축구팀. ‘어쩌다 FC’와 한번 겨루고 싶다고 신청을 하면 스토리가 가장 그럴 듯한 팀을 골라서 경기를 했다.

처음엔 예능이 재미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면면 모두가 자기 제 분야에서나 전설이지 축구는 사실상 처음 해본 초보들, 은퇴한 지 오래라 체력 또한 ‘저질’이 된 지 오래인 전설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출연했을 때는 “축구 그까이꺼, 대충 뻥뻥 차대면 되지”하고 나왔다가 헛발질만 계속하던 ‘별’들이었다. ‘한국 스포츠의 기라성’들은 첫 출전 후 16번을 연달아 졌다. 14대 1, 11대 0, 12대 0, 8대 0 같은 무참하고 처참한 패배가 줄을 이었다. 서울신정초등학교 아이들과 붙었을 때는 12대 2로 졌다.

예능 한 시간이 끝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축구를 보다가도 스코어가 벌어지면 TV를 끄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예능이 빨리 끝나고 경기가 어서 시작되기만 기다리며 끝까지 보고 있다. 이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연패 후 어제(7월 26일)까지 16경기 중 6번을 이기고 4번 비겼으며 6번 졌다. 창단 후 첫 상대로 11대 0이라는 수모를 안겼던 ‘새벽녘 FC’와는 1년 뒤 다시 붙어 접전 끝에 연장에서 1대 0으로 졌고, “우리와 비기기만 하면 공식 조기 축구 대회 4강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들을 얕잡아 본 서울 조기축구계의 ‘명문팀’에게는 4대 1이라는 점수로 이겼다.

‘어쩌다 FC’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어쩌다가 동네북 신세에서 벗어나 5경기 무패 행진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됐나. 원래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들이고, 체력도 금세 좋아질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됐으며, 특히 최근에는 축구 잘 하는 젊은 별들을 영입한 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다 FC’ 선수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별’들은 처음엔 자신의 자존심을 엄청 내세웠다. “안정환만 스타냐, 나도 스타다”라는 자존심이 팀으로 뭉치는 걸 방해했다. 안정환이 훈련을 시키면, 재미와 웃음을 줘야하는 예능인 점을 감안해도, 훈련에서 뺀질뺀질 거리거나, 경기에서 실책이 나오면 서로 “내가 잘했느니 네가 못했느니” 책임을 미루고, 경기장에서 동료에게 얼굴을 붉히는 장면도 없지 않았다. 단체경기이자 소통으로 협업해야 하는 축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자극을 받았는지, 원래 프로그램 기획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때부터 이 기라성들은 훈련을 즐거이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시간을 따로 내서 개인적으로 축구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감독 안정환의 전술과 지시를 전보다 더 잘 따르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전처럼 대충하면서 “그꺼이꺼”만 되뇌다가는 자신은 물론 자신이 평생 피땀 흘렸던 종목의 명예가 손상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두고 “한국의 스포츠 전설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존심을 찾아나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환의 자존심도 작용했다. 누가 뭐래도 한국 축구의 간판스타인 그 역시 예능 프로를 위한 축구팀인 ‘어쩌다 FC’의 감독을 맡았지만 훈련을 시키고, 전술을 설명할 때는 “이왕 맡았으면 내 이름을 지키고 한국 축구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지도자라면,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자존심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매주 일요일 9시부터 하는 ‘뭉쳐야 찬다’ 본방사수와 함께 예전 것 몇 편만 보시라. 경기 중 지시를 내리는 안정환의 표정과 말투, 격려하고 질책하는 모습을 보시라. 그리고 안정환 이상으로 자기 이름과 명예를 지키려는 선수들의 지칠 줄 모르는 경기를 보시라. 그들의 동료애를 경험해 보시라.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감동도 느끼실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험한 시대에서 ‘기분 좋을 한국인 100인’ 중에 안정환이 반드시 포함될 거라는 내 주장의 근거다.

안정환과 ‘어쩌다 FC’의 자존심을 말하다 보니, 이 정권과 이 정부가 욕을 먹는 것은 국민의 자존심을 땅에 떨어트리고, 지도자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인 나의 자존심이 이 말을 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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