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23:01
[박영재의 향상일로] ‘디딤돌’에 대하여
[박영재의 향상일로] ‘디딤돌’에 대하여
  •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 승인 2020.07.2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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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성찰배경: 우리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하곤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만연된 코로나-19 감염 사태도 그런 어려움에 속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어려움에 대처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는 이를 걸림돌로 여겨 주위 분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포함해 자포자기하며 주저앉는 쪽과 이를 디딤돌로 삼아 향상의 기회로 삼는 쪽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걸림돌과 디딤돌에 대해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 안과 밖

물리학에는 ‘안은 밖이고 밖은 안이다’라는 상식을 뒤바꾸어 놓으면서도 우리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뫼비우스띠’란 모델이 있습니다. 이 띠는 긴 직사각형 종이조각의 긴 쪽 양 끝을 뒤틀어 붙혀 누구나 쉽게 형상화 할 수 있는 한쪽 면만 존재하는 이상한 띠입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띠의 바깥 표면을 따라 종이의 긴 쪽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내외불이(內外不二)’의 실상을 물리학의 모델을 통해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하듯이, 우리 모두 모든 것을 안과 밖이나 갑과 을 등으로 나누는 이원적인 분별행위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 살아가면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도 매우 줄어들 것이라 확신합니다.

◇ 요직과 한직

사실 안목(眼目)이 좁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은 피상적으로 직장이 수도권을 포함해 서울에 있으면 요직(要職)이고 지방에 있으면 한직(閒職)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공직 이력을 살펴보면 생각이 바뀌시리라 여겨져 이를 구체적인 사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26세 때 공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29세 때 황실이 수장하고 있는 진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직책을 담당하며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불서(佛書)를 즐겨 읽기 시작합니다. 39세 때 가난한 지역인 밀주(密州) 태수(太守)로 부임하면서 빈곤과 기근을 도처에서 목격한 그는 비애를 느낌과 동시에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공직자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이를 일관되게 실천하게 됩니다. 그는 44세 때 당시 실세였던 왕안석을 추종하는 안목 좁은 개혁파의 역모(逆謀) 공작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46세 때 황주(黃州)에 도착해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산비탈에 거처인 ‘동파설당(東坡雪堂)’을 마련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생계를 겨우 꾸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어려운 시기를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삼아 불후의 명작인 적벽부(赤壁賦)를 짓고, 또한 이 무렵 참선 수행에도 몰입하게 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가 지방에서 책임 없는 한직을 맡았을 때 틈날 때마다 근처 사찰들을 방문해 선승(禪僧)들과 교우하며 마음공부를 하였기에 유배 시절을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삼아 깊은 깨달음에 도달해, 필자의 앞글 ‘서로 도우며 잘 살기’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멋진 오도송(悟道頌)도 남겼다고 사료됩니다.

◇ 있는 그 자리가 향상의 디딤돌

필자의 경우 서강대에서 입자물리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83년 2월 하순 바로 춘천에 위치한 국립 강원대 공채에 선정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무렵은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졸업할 경우 국내학위든 국외학위든 별 어려움 없이 교수가 될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습니다. 즉시 춘천으로 이사해 참선 수행을 병행하며 첫 학기 강의 준비와 진행 중인 연구주제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춘천은 서울과의 접근성이 좋아 1주일에 한 번 서강대를 방문해 공동연구와 세미나 참석 및 등촌동에 사셨던 종달 선사님을 방문해 마음공부 점검도 하루에 다 할 수 있어, 비록 왕복 6시간 정도 걸리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최적지였습니다.

또한 사립대는 임용 후 6년이 지나야 연구년이 가능한데 국립대는 외부 지원이 있는 경우 조기에 연구년이 가능해 필자의 경우 한국과학재단의 해외연수프로그램에 선정되어 4년 반 재직 후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 이론물리연구소에서 1년간 방문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필자가 이 시기를 도약의 디딤돌로 삼아 스승의 도움 없이도 홀로 참선 수행을 이어갈 수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오직 연구에 전념하며 두루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값진 향상(向上)의 여정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국 1년 후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모교로 전직했으며, 이후 생업(生業)과 수행(修行)이 둘이 아닌 ‘생수불이(生修不二)의 삶을 치열하게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좁은 안목의 담판한

십수 년 전의 일입니다만 필자가 예전에 살던 동네 쌈지공원에 있는 연못을 지나다가, 오랜만에 청소를 했는지 연못물이 투명해 주위 풍광이 뚜렷하게 비치기에, 둘레를 천천히 돌면서 물에 비친 멋진 풍광들을 찍다가 문득 ‘담판한(擔板漢)’이란 선어(禪語)가 떠올랐습니다.

‘담판한’은 직역하면 어깨에 둘러멘 널빤지가 한쪽 시야를 가려 양쪽을 모두 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종에서는 이를 차용해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편에 사로잡힌 편견을 가진, 즉 확증편향된 사람을 통렬하게 비판할 때 쓰는 말로, 선종어록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선(禪)과 교(敎)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집착하는 수행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다음과 같은 일화에 나옵니다.

“목주도명(睦州道明, 780-877) 선사는 평소 참선하는 선승(禪僧)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즉시 문을 닫아걸었고, 경전(經典)을 강의하는 강승(講僧)을 보면 ‘좌주(座主)!’ 하고 부르고, 이때 강승이 ‘예!’ 하고 대답하면 ‘담판한(擔板漢)!’이라고 꾸짖었다.”

사실 우리 눈은 연못 주변 풍광 가운데 수면에 비친 바라보는 반대쪽의 풍광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주변 풍광이 비춰진 모습을 두루 보려면 반대쪽으로 가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편 성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곤 하지만 잘못하면 늘 치우친 한쪽만 돌아보고 전체를 살피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3년 전 무렵에는 연구실 화초에 물을 주다가 벽에 붙어 있는 큰 화분에 골고루 물을 주기 위해 반대쪽으로 돌리는 순간 그동안 큰 잎사귀에 가려 못 보았던, 고개를 들고 버티고 서 있는 작은 버섯이 필자에게 ‘담판한이 되지 마세요!’라는 경종(警鐘)을 울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언론매체의 보도를 통해 종교계와 정치계뿐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대활약(?)하고 있는 ‘담판한’ 소식을 거의 매일 접하고 있는데, 이럴 때마다 즉시 필자만이라도 남은 여생 동안 함께 나누면 나누었지, 좁은 소견으로 이웃에게 상처 주는 삶은 결코 살지 말자고 다짐을 하곤 합니다.

◇ 넓은 안목으로 생명 살리기

필자의 견해로는 이제는 코로나-19 질병 관리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해졌다고 보기에, 이의 확산 방지 및 치유 노력은 지속하되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업무 핵심담당자 분들께서 담판한이 아닌, 보다 넓은 안목으로 사망 통계 자료를 세밀히 살펴 투입해야 할 예산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안배해야 할 시급한 때라 여겨집니다.

먼저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 1월 20일 국내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누적 확진자 현황(7.29. 기준)은 1만4,251명이고 완치자는 1만3,069명이며, 사망자는 300명입니다. 이는 약 6개월 동안의 통계수치이니 1년으로 환산하면 확진자는 약 2만8,500명이고 완치자는 약 2만6,140명이며, 사망자는 600명 정도가 됩니다.

한편 중앙자살예방센터 ‘국내외 자살 현황 분석자료’에 따르면, 가장 최근 통계인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코로나의 약 23배인) 1만3,670명이며 자살사망은 전체 사망원인 5위로 암, 심장질환, 폐렴, 뇌혈관질환 다음으로 높고, OECD 국가 중 자살사망 1위라는 오명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참고로 몇 해 전 한 대기업의 전무이사가 부사장으로 승진한 지 몇 주 후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보다 확대된 업무 스트레스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분은 앞을 향해 정말 열심히 달렸던 선량한 분 같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만일 이 분이 자신을 돌아보며 한계를 성찰할 수 있는 태도를 평소에 길렀었다면 부사장 직에 연연하지 않고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남은 여생을 멋지게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 기업은 그 직후 구글의 ‘내면검색’ 프로그램을 참고하며 성찰치유를 위한 장기프로그램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덧붙여 지난 주말 지인과 수락산 산행을 다녀왔는데, 산행할 때마다 목격합니다만 해당 지역 보건소에서 설치한 다음과 같은 문구의 팻말들을 흔히 접하곤 합니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부신 날들이”, “자살충동과 우울은 치료가 필요하고 나을 수 있습니다.” 등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는 이런 팻말들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의 검토를 포함해, 위기를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삼아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도록,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이 적극적으로 강구되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