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예수정이 영화 ‘69세’(감독 임선애)로 관객과 만났다. /엣나인필름
배우 예수정이 영화 ‘69세’(감독 임선애)로 관객과 만났다. /엣나인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어른’은 사전적 의미로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을 의미한다.

배우 예수정은 ‘어른’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와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틀에 맞춰 산다거나, 거창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하고, 주체적인 삶을 스스로 영위해나가는 것, 그것이 ‘어른’ 예수정이 사는 법이다.

예수정이 영화 ‘69세’(감독 임선애)를 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노년 여성 그리고 배우로서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몰라서 외면했을 수도 있는 이 사회적 문제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서다.  

지난 20일 개봉한 ‘69’세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예수정 분)이 부당함을 참지 않고 햇빛으로 걸어 나가 참으로 살아가는 결심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사바하’ ‘남한산성’ ‘화차’ 등 수십 편의 장편 영화에 참여한 스토리보드 작가 출신 임선애 감독의 첫 연출작으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부문 KNN 관객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69세’ 포스터. /엣나인필름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69세’ 포스터. /엣나인필름

그동안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노인 성폭행 범죄를 소재로 한 ‘69세’는 성폭력 문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인 여성의 인권과 편견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유의미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건을 자극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고, 절제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낸 점도 호평의 이유다. 

예수정의 힘이다. 효정으로 분한 그는 덤덤하면서도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열연으로 극에 무게를 더한다. 수많은 편견과 시선, 사회적 차별과 싸우며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69년 효정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 마음을 흔든다.

예수정은 단순히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직접 아이디어를 내며 영화를 함께 만들어갔다. 임선애 감독의 따뜻한 시선에 예수정의 깊이 있는 해석이 더해져 지금의 ‘69세’가 완성됐다.

스크린 밖에서 만난 예수정은 한마디로 ‘멋진 어른’이었다. 은근한 카리스마에 긴장한 것도 잠시, 유머러스한 입담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꾸밈없이 솔직한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답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콕 새겨졌다.

-어떤 점에 끌렸나.
“소재 자체가 관심을 끌었던 건 아니다. 소재는 오히려 픽션이면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을 만나 물어보니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 그렇다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여성 상대 성폭행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가 (피해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한들 누가 믿겠느냐 취약성 때문이라고 하더라. 정말 소수약자의 이야기구나 싶었다.

소수 약자의 이야기를 실화에 기인해서 쓴 것이라 과장 없이 잘 그려져 있었다. 당한 자의 이야기보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시선들이 기가 막히더라. 그런 점에서 작품이 사회성이 높다고 생각이 들었고 좋았다. 구성 하나하나 지지부진한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이 인물이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에 대한 구조도 탄탄했다. 여러 장점이 있었다.”

-특정 한 명의 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를 대변하는 캐릭터라 부담감은 없었나.
“부담 없었다. 일단 장르가 다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는 그 상황을 명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숙제 외에는 (부담 없다). 즉 69세 노인이 20대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절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69세 노인이면 직업도 없을 것이고, 직업이 있다고 해도 돈도 잘 못 버는 직업이고 더 힘들 거다. 거기에 여성이다. 그렇다면 소수 약자라는 거다. 그 소수 약자에게 가장 무례한 짓을 한 거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불편함이나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다. 범위를 넓혀 생각했다. 내가 몰라서일 수 있지 않나. 그들에 대한 사회의 무례함이 훨씬 많이 있을 거다.”

‘69세’에서 효정을 연기한 예수정. /엣나인필름
‘69세’에서 효정을 연기한 예수정. /엣나인필름

-배우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됐다고 들었는데.
“(임선애) 감독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인물을 감싸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인생을 걸어간 이 정도 나이의 인물에게 쌍가락지가 왜 필요하겠나 싶었다. 한 남자의 옆에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진작했을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감춰져 있으나 자기가 영위하려는 삶의 결이 있을 텐데, 너무 따뜻하게 감싸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겠냐고 (감독에게) 말했더니, 하하 웃으며 좋은 결말을 (다시) 써 왔더라.(웃음)”

-결말이 바뀌면서 효정 캐릭터에 대한 변화도 있었나.
“크게 바뀔 건 없었다. 이미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아무래도 신고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지 않나. 신세를 지고 있고, 친구로서 애정이 있는 남자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다. 효정과 동인은 같이 살지만, 각 방을 쓴다. 쇼핑도 각자 한다. 집에 얹혀사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늘 있어서 책방에 가서 먼지를 털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구석구석 개체적인 삶이 잘 쓰여있었다.”

-효정이 겉으로 크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분노했다. 그런데 69년을 살아오면서 이 사회의 무례함을 얼마나 당해왔겠나. 보호받는 위치에서 여기까지 자기 삶을 묵묵하게 견뎌온 삶이라면 상당히 많이 꿀꺽꿀꺽 삼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노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당해왔고, 숨을 죽여 살아온 거다. 자기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는 죄의식을 느꼈을 것 같다. (효정의) 가정이 나오지 않지 않나. 딸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도 않는다. 과거가 안 나오지만, 안 나오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생각할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죄스러운 게 있을 거다. 그래서 늘 한 쪽 어깨가 내려가고 사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숨어들려고 하는 면도 있을 거다.

그러다 정말 분노했을 때 나 예수정은 ‘버럭’하는데, 그 ‘버럭’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글귀가 있는데, 명제가 정의가 됐든 자유가 됐든 무엇이 됐든 그것을 주장할 때 온도가 너무 높았을 때는 그 안에 개인의 욕심이 있다는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거였다. 나의 문제는 ‘버럭’한 다음에 떠올리는 건데, 이 인물이라면 그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순간적인 ‘버럭’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심사숙고해 내린 결론으로서 행위 하겠구나 싶었다. 내가 조심하고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말미 효정이 가해자를 향해 내뱉는 대사가 인상 깊었는데, 배우의 아이디어인가.
“임선애 감독은 문학적으로 써 왔다.(웃음)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개xx’ 해야 하는데, 그런 단어를 느닷없이 듣게 될 때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 물에 따라가지 말고, 문학적으로 치장하지도 말고 정확하고 단호하게 가자고 생각했다. (감독에게) 효정이 ‘너 진짜 개구나’ 그 말을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감독이) 하라고 해서 했다.”

예수정이 노인을 향한 편견과 시선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엣나인필름
예수정이 노인을 향한 편견과 시선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엣나인필름

-효정은 ‘노인답지 않다’거나 ‘처녀같이 늘씬하다’ 등 수많은 편견, 시선과 마주한다. 배우로서 여성으로서, 공감이 많이 됐을 것 같은데.
“나는 알아서 욕먹지 않으려고 아주 소박하게 내 인물에 맞게 입고 다닌다.(웃음) 작품에서 의미하는 건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거다. 물론 나도 예전에 백화점이나 병원에 갈 때 오래된 단화나 운동화 말고 높은 구두를 신기도 했다. 자동차도 그렇다.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것이 주차장인데, (차종에 따라) 다르다. 이 사회에 여러 가지 이상한 면이 많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없어지리라 본다. 우리가 한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가할 때는 비판할 게 많다.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삶의 본질에 다가가 스스로 바쁠 때는 자기 삶에 집중하느라 남이 무엇을 하든, 80세 노인이 원피스를 입고 해운대 비치를 걷고 있든 말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 여러 의미의 편견에 대한 것을 (‘69세’가) 잘 꼬집어낸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일 텐데, 백발을 유지하는 것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뻔뻔해서 그렇다. 하하. 나도 염색을 하긴 했다. 40대 때 머리가 일찍 셌는데, 새치 염색을 안 하고 학교에 나가면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한다. 원로 선생님이 오셨다고 어려워하니 염색을 했다. 그런데 흰머리가 많아지다 보니 귀찮더라. ‘그대로 살 거야’ 하니 이렇게 됐다. 내가 맡은 역할들이 내 연령보다 훨씬 높기도 했고, 어차피 백발이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흰머리가 섞여있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노년의 삶을 들여다본 작품이 많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영화다.  
“앞으로 많아질 거다. 우리 사회가 노령사회가 된다니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지 않겠나. 구성원을 알아야 사회도 대처해나가고, 주고받으면서 성장해나가잖나. 매체와 사회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변천해나간다. 구성원의 대다수가 노년이라면 많아질 거다. 아니, 많아질 필요는 없다. 제대로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몇몇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고마운 거다.”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예수정. /엣나인필름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예수정. /엣나인필름

-절절한 모성애부터 세고 강렬한 캐릭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잘 소화하진 않고 노력한다. 우리(배우) 숙제인걸.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들도 많이 있을 텐데, 나는 나 자신이 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작품을 잘 읽어내고 작품에서 그 역할이 가는 방향을 세심하게 짚어내서 가야하는 입장이다. 배우보다 작품을 보러 오지 않겠나. 그것에 위안을 얻는다.”

-연극 무대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 배우 생활을 해오고 있는데, 연기란 예수정에게 어떤 의미인가.
“배우가 참 좋은 직업이다.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 역할에서 배우는 게 있다. 최근 막을 내린 연극 ‘화전가’를 예를 들어보더라도, 50년대 시대의 인물인데 침묵할 때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워낙 ‘버럭 형’이기 때문에, 침묵할 때 침묵하되 결정적으로 능동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누가 뭐라 해도 60년 이상 침묵해온 무게만큼 용단을 내려 결단하는 부분에서 많은 걸 배웠다. 배운다고 다 그렇게 살겠냐마는.”

-인터뷰 내내 굉장히 멋있는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맙다. 그렇게 느꼈다면, 무명의 힘이다. 스스로 무명임을 자체하고 무명의 길을 걷고, 스스로 행복해하는 자의 힘이라면 힘일까.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누가 나를 구속하겠나. 하하.”

-어떤 ‘어른’으로 살고자 하나.
“대단한 거 없다. 그저 덜 주책 부리면서 덜 피해주려고 한다. 유기체적으로 힘이 없어졌을 때는 큰 존재, 관대함 속에서 하루속히 소멸되기를 원할 뿐이다.” 

-연극 대사 같은 답이다.
“삶이 연극이라 하지 않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받으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누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살겠나. 오늘을 살기도 바쁜데…”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