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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극’영화에 ‘소설’쓰지 말라는 불편러들에게
[기자수첩] ‘극’영화에 ‘소설’쓰지 말라는 불편러들에게
  • 이영실 기자
  • 승인 2020.08.25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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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9세’ 포스터. /엣나인필름
영화 ‘69세’ 포스터. /엣나인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심효정 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심씨는 동거 중인 ‘남사친’ 남동인 씨와 함께 경찰에 신고를 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들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심씨의 진술에 의심을 품는다. 법원 역시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이유는 하나다. 피해자 심씨는 69세 ‘노인 여성’이고, 가해자 남성은 29세 ‘청년’이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를 담은 영화 ‘69세’는 허구이기도 하고, 실화이기도 하다. 이미 뉴스를 통해서도 알려진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라는 프레임 안에 담겼기 때문에 ‘허구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연출자 임선애 감독이 2013년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관련 칼럼을 읽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으니, ‘실화를 모티브로 한 허구의 창작물’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그런데 이 ‘극’영화를 두고 일부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소재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며 ‘평점테러’를 가하고 있는 것. 특히 이들 대부분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적인 비방을 쏟아내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첫째, 노인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행 범죄가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는 것. 둘째,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것. 이들은 1점대 낮은 평점과 함께 ‘망상을 그대로 만들어낸 영화’ ‘할머니를 누가’ ‘소설 쓰고 있다’ ‘수준 낮은 선동용 영화’ 등 조롱과 악성댓글을 무수히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틀렸다. 우선 노인 성폭행 범죄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실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강간‧강제추행 범죄의 발생건수는 2만3,478건, 검거건수는 2만2,644건이었다. 2014년부터 꾸준히 증가해 2017년 가장 많았고, 2018년에는 다소 감소했다.

강간 피해자의 성별‧연령별 분포를 살펴보면 2018년 기준, 여성 피해자의 경우 50%이상이 16세 이상 30세 이하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의 연령이 51세 이상인 경우는 10.0%를 차지했다. 2014년 7.9%에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암수범죄(실제 범죄가 발생했지만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아 수사기관 통계에 잡히지 않은 범죄)까지 감안하면, 실제 피해 건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남성 피해자의 수는 전체 피해자에서 5% 미만을 차지했다.

왜 창작물을 두고 경찰청 범죄 통계까지 들먹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실제 사건이다.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 될 ‘진실’이다. 나이가 문제인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령대가 바뀌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69세’를 관람한 관객으로서, 이 영화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의견도 동의할 수 없다. 극 중 남자 간호조무사는 사건의 가해자일 뿐이지, 20대 청년 더 나아가 남성 자체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효정이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가해자 역시 극 안에서 하나의 역할로 존재할 뿐이다.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았을 뿐, 남성을 향한 혐오적 시선은 없다.

영화가 여성은 미화하고, 모든 남성을 악역으로 그린 것도 아니다. 가해자를 두고 ‘친절이 과했네’라거나, 피해자를 향해 ‘조심 좀 하지 그랬냐’라는 말로 효정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이들은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다. 아무렇지 않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걱정과 관심이라는 말로 ‘2차 가해’를 가하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여성주의영화를 향한 무분별한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남감독과 남배우, 남캐릭터들이 주를 이루는 충무로에 최근 몇 년 간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선두주자에 섰던 거의 모든 영화들이 ‘69세’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여성 투톱 형사물 ‘걸캅스’(2019)가 그랬고,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삶을 담은 ‘82년생 김지영’(2019)도 평점테러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한 ‘벌새’(2019) 역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그렸다는 이유로 ‘욕’을 먹어야 했다.

영화가 바뀌어도, 평점테러를 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남성 혐오’를 부추기고, 젠더 갈등을 조장한다는 것. 그리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특정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스크린 속 김지영이, 69세 노인 심효정이 당한 편견과 차별이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