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4·15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이 ‘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군. 1997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이 된 이후 새누리당(2012년), 자유한국당(2017년), 미래통합당(2020년 2월)을 거쳐 이번에 국민의힘이 탄생한 거야. 이름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우리나라 보수정당들의 변천 과정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 더 심각한 것은 이 나라 최대 보수 정당의 수명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거야. 한나라당의 수명이 대략 15년이었던 반면에 미래통합당은 7개월 단명 정당으로 막을 내렸어. 국민의힘은 얼마나 오래갈지…

지난 6월 1일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한 이래 국민의힘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보수정당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네. 9월 2일에 전면개정하여 발표한 당의 정강·정책인 ‘모두의 내일을 위한 약속’에 이런 다짐이 있더군. “우리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하며 진영 논리에 따라 과거를 배척하지 않는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 등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산업화 세대의 ‘조국 근대화 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공고히 한 2·28 대구 민주운동, 3·8 대전 민주의거, 3·15 의거, 4·19 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 등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어간다.”5·18을 폄훼하고 왜곡만 하던 보수정당이 5·18 민주화 운동 등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어가겠다니 큰 변화 아닌가? 보수 정당의 대표로는 처음으로 5·18 추모탑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부끄럽다’‘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보여주기 쇼라는 의심도 들었지만, 정강·정책을 보니 중도보수로 나가려고 애쓰고 있는 게 확실해. 바람직한 변화여서 일단 보기 좋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보였던 기본소득과 경제민주화를 당의 기본정책으로 내걸고‘약자와의 동행’선언 등을 통해 당의 외연을 중도로 넓히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이 무엇보다도 먼저 보여줘야 할 것은 극우세력들과의 확실한 결별일세. 당 강령의 한 부문인 ‘우리의 믿음’ 4번째에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공공의 선이 존재하고, 자유는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된다고 믿는다”는 선언이 있더군. 이런 믿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국민의힘은 전광훈을 포함한 모든 극우 교회, 정치세력과 완전히 결별한다는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네. 그리고 방역 당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집회를 열어 코로나19를 다시 전국으로 확산시킨 보수단체들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개천절 집회에 대해서도 당장 취소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해야 해. 대구·경북의 친박에 가까운 당내 주류 세력 눈치 보다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될 수도 있어.

국민의힘 기본정책인 <10대 약속>들 중 하나인 ‘내 삶이 자유로운 나라’항목을 보면, “모두 함께 행복한 돌봄 공동체를 만들겠다”면서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책임제를 확립하고, 촘촘한 사회안전망 형성을 통해 빈곤 등 복지사각지대를 해소한다. 소득·지역·계층에 따른 격차 없이 질병에 대해 적절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감염병 등 공중보건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한다”고 말하고 있네. 이 약속이 진심이라면 이번 의사 파업에 대한 국민의힘의 입장이 더 분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누구나 적절하게 치료를 받고 공중보건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이 의사정원 확대와 공공의료 확충 없이 가능하다는 뜻인지 모르겠어. 그들이 여당이 된 후에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최강 기득권세력들 중 하나인 의사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국민의힘이 당 이름 그대로 정말로 ‘국민의 힘’이 되기 위해서는 이번에 불법적인 파업을 강행한 의사단체들에게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싸움 그만하라고 호되게 비판했어야 했네. 하지만 국민의힘은 국민들 절반 이상이 의사들 파업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의사들보다 정부 여당 비판에 더 열심이었던 게 사실이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 3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100일은 변화와 혁신의 시동을 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약자와 동행하는 정당, 국민통합에 앞장서는 정당, 누구나 함께하는 정당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고 말했더군. 아직 예전 미래통합당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점도 많지만, 꼭 그렇게 되길 바라네. 어느 나라든 보수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진보도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거야. 보수가 중도로 와야 진보도 더 왼쪽으로 갈 수 있거든. 그런 점에서 국민의힘의 중도보수화가 꼭 성공해서 우리나라 정치 지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왼쪽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후퇴하지 않을 변화와 혁신의 디엔에이를 당에 확실히 심겠다”는 김종인 위원장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유야. 지난 6월 1일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진보보다 더 진취적인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던 다짐이 꼭 이루어져서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이 오래오래 장수하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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