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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의 늦은수다] ‘우주의 미아’로 울부짖고 싶지 않다
[정숭호의 늦은수다] ‘우주의 미아’로 울부짖고 싶지 않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2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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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TV 뉴스 토크쇼를 보다가 아내의 교회 친구 부부와 밥을 먹으러 동네 ‘○○몰’로 나갔다. 코로나가 걱정 안 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더 미뤄서는 안 될 약속이어서 강행했다. 1년 전 몰이 문을 열었을 때, 바깥에서 대기명부에 이름을 써놓고 한참 기다려야만 했던 4층 식당가의 식당 중 불 꺼진 곳이 많았다. 문을 열지 않은 곳이 절반이었다. 아이들이 재재거리며 뛰놀던 ‘키즈 존’은 탈 것과 게임기의 불빛만 번쩍거려 약간은 기괴했다. 옷가게 신발가게 장난감가게 모두 텅 비었다. 문은 열었어도 주인과 알바생이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가게 안을 왔다 갔다 서성이는 모습을 보자니 “을씨년스럽다”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탁번 시인(77. 고려대 명예교수)의 시 ‘폭설’이 다시 생각났다. 작년 7월 ‘한여름 한국 경제에 내리는 폭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쓸 때, ‘지읒(ㅈ)’자로 시작되는 육두문자가 등장하는 이 시를 인용했는데, 1년 여 만에 이 시가 또 떠올랐다. 경제가 그때보다 더 나빠진 데다 그동안 내 입이 더 걸어진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TV 뉴스 토크쇼를 볼 때는 하루도 욕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날도 집 나서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욕을 내뱉고 있었다.

“왜 딸이 하는 식당에서 정치자금을 썼느냐”는 물음에 법무부 장관이 “딸 식당이라고 공짜로 먹습니까?”라고 말 같지 않은 말을 할 때 욕 소리가 가장 컸고, “아이가 영어 실력이 괜찮죠? 영국 유학했죠? 오히려 통역병 면접 봤으면 뽑혔을 거 같은데 제비뽑기해서 불이익 당한 거 죠?”라는 여당 의원 정 모의 질문과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한 아이고 능력을 가진 아이이며, 오히려 역으로 제 아이인줄 먼저 알아보고 군 내부에서 원래 정상적인 방식을 바꿔서 제비뽑기로 떨어뜨렸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는 법무부 장관의 답변, 이 답변에 대해 “엄마로서 맘고생이 많았을 텐데 장관님 힘내십시오”라고 정 모가 마무리를 했을 때는 욕의 농도가 가장 짙었다.

내 욕의 빈도를 잦게 하고, 농도를 짙게 하는 자들은 법무부 장관과 여당 의원 정 모 말고도 많다. 후광이라는 호를 가졌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수십 억 원을 받아먹은 전력이 있는데도 여당 국회의원이 됐다가 당에서 제명된 김 모, 항공사를 만들어놓고는 직원들 급여는 안 주고 자식들에게는 거액을 물려준 이 모(역시 여당 의원이다), 기부금을 털어먹은 혐의로 기소된 정대협 전 이사장 윤 모(역시 여당 의원이다) 등등이 그들이다. 수십 명은 족히 된다. 이미 공개된 그들 이름을 여기 쓰지 않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욕이 따라 나와 내 입이 더 더러워질 것 같아서다.

‘폭설’은 좀체 눈이 오지 않는 남도 어느 마을에 사흘 동안 눈이 무지막지하게 내려 엉망이 된 마을의 이장이 마을회관 마이크를 잡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전해준다. 이장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지읒’자 육두문자는 시 뒷부분에 슬쩍 비치는 힘 좋은 이장과 낮에는 수줍을 것만 같은 이장 아내의 순박하면서 야한 한밤중 모습을 은근하게 연상시킨다. 상스럽거나 천박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시를 전문 고대로 옮기고 싶지만 좀 긴데다 언론이 지켜야 할 바를 적시한 ‘윤리강령’이 가로막는다. 하지만 말을 꺼냈으니, 마을 이장의 울부짖음을 좀 줄이고, 욕설을 ‘X’로 바꿔서라도 옮기는 게 글 쓰는 이로서 옳은 행실이지 싶다.

첫날 아침 이장은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 눈이 X나게 내려부렸당께!”라고 주민들을 불러 모은다. 눈이 많이 내렸지만 치울 일이 걱정된다기보다는 오랜만에 쌓인 눈이 즐겁다는 표정이 비친다.

둘째 날은 전날보다 더 많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다 내려앉았다. 이장은 “주민 여러분, 어제 온 눈은 X도 아닝게 싸게 싸게 나오쇼”라고 외친다. “싸게 싸게 나오쇼”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아직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장은 협심해서 눈을 치웠다는 뿌듯함에 저녁에는 마을회관에서 마을사람들과 한 잔 걸치고 잠자리에 든다.

사흘째 아침, 아내와 즐거운 밤을 지내는 사이 눈은 전날보다 훨씬 많이 내렸다. 비닐하우스보다 몇 백배는 튼튼할 시멘트 축사들이 모조리 내려앉았다. 바지춤을 잡고 마을회관으로 올라간 이장은 마이크를 붙잡고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우리 동네 인자 몽땅 X돼버렸소잉!”이라고 울부짖는다. 시인은 이장이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고 썼다.

작년 7월의 칼럼에서 나는 “주민 여러분, 우리 동네 인자 몽땅 X돼버렸소잉!”이라는 이장의 울부짖음(시의 끝줄이기도 하다)을 “‘국민 여러분, 우리 경제 인자 몽땅 X돼버렸소잉!’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나”라고 썼다.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 주 52시간 근무제,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조의 파업과 시위가 우리 경제를 안에서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중무역분쟁으로 수출마저 계속 푹푹 줄어들더니, 마침내 일본의 반도체 핵심부품 대한 수출규제까지 겹쳐 너무나 암울해진 한국 경제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지금은 경제만 X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그렇게 된 것 같다. 예전, 대통령의 입에서 시작된 ‘공정과 정의와 평등’이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그나마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을 때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 우주의 미아가 되어 “우리나라 X돼버렸소잉!”이라고 울부짖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