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권의 막무가내, 방약무도, 안하무인, 안면몰수, 곡학아세, 그리고 부정부패의 기세가 갈수록 등등합니다. 예전의 썩은 권력자들이 적어도 국민 앞에서는 복종하는 것처럼 하다가 뒤돌아서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면종복배(面從腹背)’의 모습이었다면 지금 권력자들은 ‘면배복배(面背腹背)’라고 할 만합니다. 다수의 국민을 면전에서도 배신하고, 돌아서서도 배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권력자들은 그나마 부끄러움과 염치가 있어서 국민 앞에서는 몸을 사렸는데, 지금 권력자들에게는 그런 몸가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민을 존중하는 마음이 아예 없는 겁니다.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의 글이 떴습니다. “요즘 뉴스를 끝까지 보기 힘들다.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서도 뉴스를 보다보면 어느새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다. 모욕을 넘어 모멸감을 향해 돌진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권력형 비리와 온갖 거짓들이 빤히 보이는데도 너무나 당당한 이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꼴을 보노라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존재마저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생략) 정권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특권에 별로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울산 시장 정치개입부터 지방도시 고속버스터미널 부지 로비, 신라젠, 옵티머스, 라임까지 역대 어느 정권보다 화려하게 해먹은 것 같은데 그저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끝까지 버티다 보면 국민들이 아예 원래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상황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작전은 성공했다. 이제 화도 나지 않는다. 분노도 느낄 수 없다. 뭔가 바뀌고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별로 없다.” (원문에 나오는 특정 인물들의 이름은 지웠습니다.)

앞의 글을 읽으면 대한민국이 ‘죽음의 5단계’에서 4단계인 ‘우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고, 뒤의 글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겪게 되는 심리상태라고 합니다. 스위스 출신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가 1968년 써낸 ‘죽음의 순간’이라는 책에 소개한 후 여러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죽음의 이론’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부정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부인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암 진단을 받고는 “내가 암에 걸릴 리 없어”라며 치료를 거부하고는 다른 병원을 찾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암에 걸린 걸 확인한 후 “왜 내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암에 걸리냐구!”라며 분노를 표출하고 행동에도 그런 게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아갈 테니 나를 살려주세요”라며 무신론자는 유신론자가 되고, 유신론자는 그 믿음이 더 깊어지는 단계입니다. ‘우울’은 타협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몸은 더욱 쇠약해지면서 맞이하는 네 번째 단계입니다. “이러다가 죽겠지”라면서 깊은 회한에 빠지는 겁니다. ‘우울’의 단계도 지나면 “죽음이 별거겠어? 다들 죽는 건데, 난들 다르겠어? 그냥 받아들이자구”라며 죽음을 ‘수용’하게 된답니다.

앞의 페이스북 글에서 본 것처럼 권력자들의 각종 만행 때문에 ‘우울’에 빠지고, ‘수용’의 단계에 이른 사람까지 있으니 이제 대한민국은 ‘죽음의 5단계’ 이론에 따라 곧 죽음을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죽지 않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쉽게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병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 죽음만을 기다릴 정도로 중증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투쟁하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퀴블러의 죽음의 5단계 이론에도 반론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퀴블러가 말한 순서대로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우울’에 빠져서 죽음을 ‘수용’했다가도 그것을 부정하고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병을 이겨내고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면배복배를 밥 먹듯이 되풀이하는 자들의 더럽고 추한 꼴을 보기 싫다며 외면만 하다가는 우리 모두 저들 원하는 대로 ‘우울’하게 살다가 결국에는 ‘수용’의 단계로 넘어갈 겁니다. 그러다가 죽는다면 저들 좋은 일만 하는 게 될 겁니다.

27차례의 거짓말이 들통 났는데도 “기자들이 거짓 뉴스를 써내고 있다”는 둥 다른 이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있는 법무부 장관 추미애에게 “나도 당신에 대한 글을 쓰기가 싫다. 역겹고 메스껍다. 그렇지만 써야 한다. 쓰고 싶어 쓰는 게 아니다.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일 뿐”이라고 토로한 한 젊은 기자가 있었습니다. 나도 써야 하니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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