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02:05
[정숭호의 늦은수다] 가을, 독서하기 어려운 계절이 되다
[정숭호의 늦은수다] 가을, 독서하기 어려운 계절이 되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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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도서관도 다시 문을 열었다. 문 연 첫날 빌려온 다섯 권을 책상 위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보았다. 제대로 읽지 못할 걸 알고도 빌려온 욕심과 미련함을 스스로 비웃다가 해본 행동이다.

“왼쪽부터 키 큰 순서로, 키가 같으면 두꺼운 순서로 꽂거나 세우는 게 보기 좋다”는 중학교 때 배운 대로 세워놓고 찍었다. 왼쪽부터 ‘발터 벤야민 평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추락하는 남자’ ‘5월의 사회과학’ ‘상징형식의 철학’이다.

왼쪽부터 ‘발터 벤야민 평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추락하는 남자’ ‘5월의 사회과학’ ‘상징형식의 철학’이다. / 정숭호 제공
왼쪽부터 ‘발터 벤야민 평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추락하는 남자’ ‘5월의 사회과학’ ‘상징형식의 철학’이다. / 정숭호 제공

빌려온 지 나흘째인데 한 권도 끝내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50년 넘도록 갈고 닦아온 독서 기술이 나날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은 쉬 피로해져 10분 지나면 글자가 두 겹으로 변하고, 집중력도 떨어져 문장이 약간만 복잡하면 두 번 세 번 거듭 읽어야 요해가 된다. 대출기간 3주 안에 한 권이나 끝낼 수 있으려나!

원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와 ‘추락하는 남자’ 두 권만 빌릴 생각이었는데, 도서관에서 갑자기 욕심이 생겨 세 권을 더 뽑아 배낭에 넣었다. 집까지 3킬로가 넘는 거리를 뚱뚱한 배낭을 메고 낑낑거리며 걷고 있는 내가 참으로 미련스러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이 나이 되도록 ‘지루하다’는 생각에 한 권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미안해하고 있던 차에, 페이스북에서 러시아 문학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주는 분의 글 몇 편을 읽고는 더 미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빌리려 마음먹은 것이고, 미국 작가 로버트 스톤의 소설 ‘추락하는 남자’ 역시 “매우 재미있다”는 페이스북 친구의 글에 유혹돼 빌리려 나선 책이다. 미뤄둔 숙제 같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다가 머리가 아프면 읽기가 비교적 쉬울 스톤의 책으로 넘어가고,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로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야심차지만 합리적이기도 한 이 독서 계획이 다섯 권으로 확대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도’ 선생과 ‘스톤’ 형의 책을 배낭에 넣고 자료실에서 나서는데, 매주 함께 이 산 저 산을 함께 오르고 산꼭대기에서는 커피까지 내려주는 수고를 마다않는 정다운 친구(김달진 박사)가 지난주 산행에서 독후감을 말해준 ‘오월의 사회과학’이 생각났다. 저자는 서울대 명예교수 최정운(정치외교학과). 김 박사는 같은 저자가 쓴 ‘한국인은 누구인가’도 잘 쓴 책이라고 했지만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아 “‘5.18’을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는 ‘오월의 사회과학’을 빌렸다.

‘오월의 사회과학’을 배낭에 넣고 지퍼를 채우는데, 갑자기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가 떠올랐다. 며칠 전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카시러와 하이데거의 다보스 논쟁’을 언급한 기사를 읽은 게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또 다른 정다운 친구(김필년 박사)에게서 수십 년째 카시러에 관한 이야기-수많은 철학자들에게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철학자”라는 말을 듣는 철학자라는 이야기 같은-를 들어오면서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창피함과 의무감이 두 번째 이유이다. 카시러의 책은 제목도 아는 게 없어서 도서관 컴퓨터에서 저자명을 검색해 찾아낸 그의 책 중 가장 깨끗한 걸 뽑아낸 게 ‘상징형식의 철학’이다.

네 권을 넣었어도 그리 불룩하지 않던 배낭은 ‘발터 벤야민 평전’을 집어넣으면서 지퍼 채우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부피와 무게가 크게 늘어났다. 하드커버에 900쪽이 넘는 이 책은 단지 카시러의 책과 같은 서가에 꽂혀 있다가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과, ‘평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배낭 속에 우겨 넣어졌다. 대체로 평전은 문체가 읽기 쉽고, 재미난 일화가 많다.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변설을 숱하게 접했으면서도 그의 저작을 만져본 적도 없는 처지라 평전이 눈에 띄자 손길이 그냥 나간 것이다.

책을 가져온 지 나흘째이나 첫 이틀 동안에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100쪽, ‘우울한 남자’ 20쪽, ‘오월의 사회과학’ 30쪽, ‘상징형식의 철학’은 서문 두 쪽을 읽었고, 벤야민 평전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나머지 이틀은 책에 손도 대지 않다가 오늘 사진 찍어보느라 만진 게 전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여전히 지루했고, 도입부가 흥미로운 ‘우울한 남자’는 계속 읽을 만했으나 거기 빠지면 다른 책은 안 보게 될 것 같아서, ‘오월의 사회과학’은 사회과학 책으로는 형용사가 많다는 느낌 때문에, ‘상징형식의 철학’은 그냥 어려워서 읽기를 일단 중단했고, 빌릴 때 충동적으로 빌렸던 벤야민 평전은 그 충동이 사그라지니 흥미도 일지 않는다.

책상에 늘어놓은 책들을 읽지는 않고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마루로 나가 TV를 켰다. 어제에 이어 법무부장관 추미애와 검찰총장 윤석열이 제대로 한판 붙었다는 뉴스와 해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옵티머스, 라임, 김봉현, 이혁진, 이강세, …. 뭐가 뭔지, 누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와, 또 누가 무엇과 연결이 됐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아항, 내 독서 진도가 안 나가는 게 눈과 집중력 저하 때문만은 아니구나, 책보다 더 쉽고, 소설보다 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책이 읽힐 리가 있나. 독서의 계절, 가을에 독서를 제대로 못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이런 시국에 책만 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상이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추미애 쪽 주장이 더 소설 같다는 느낌이다. 추미애가 여러 차례 “소설 쓰고 있네”라고 한 사람이 사실 추미애 본인과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 같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