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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재계의 거목이라고 불렸던 이건희 삼성회장이 지난 25일 별세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 긍정적, 부정적 평가 모두 존재하지만 삼성전자를 우리나라 IT산업의 핵심축으로 만들었다는 평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 사진=뉴시스, 삼성전자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우리나라엔 수많은 기업인들이 있지만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건희 회장을 우리나라 산업 전반을 이끌었던 한국 재계의 거목으로, 또 어떤 이들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와 정경유착 등을 강화했다며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긍정적·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양측 모두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우리나라 IT산업의 핵심축으로 만들었다는 평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동방의 작은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세계 글로벌 IT시장의 중심이 되기까지 이건희 회장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 “TV도 못만드는데”… 이건희 회장의 무모한 도전,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업 ‘삼성’을 만들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에 남긴 가장 큰 첫 번째 발자국은 누구나 알다시피 ‘반도체’다. 현재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플레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확고부동한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삼성전자가 반도체에 강세를 보였던 기업은 결코 아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의 역사는 1974년 삼성의 선대회장 고(故) 이병철 회장에게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경영진들은 이건희 회장의 이같은 제안에 대해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TV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삼성이 무슨 수로 IT기술의 집약체인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사실 경영진의 우려가 이상한 것은 아닌 게 삼성은 당시 TV·냉장고 등 가전 분야에서 금성전자(현 LG전자)에게 크게 밀리며 만년 2인자 자리에서 허덕이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향후 세계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이라 판단했다.

1987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산업분야를 내세웠다. 바로 반도체와 휴대폰 사업이다. 이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IT산업 전반의 기둥을 세운 '과감한' 결정이었다. 사진은 1987년 삼성회장 취임식 당시의 이건희 회장 모습./ 삼성전자

결국 삼성은 1974년 다소 무모해보일지도 모르는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 해 12월 부도 직전의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글로벌 IT선진국들은 이 같은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행보에 대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비웃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 미쓰비시 기업 연구소는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삼성전자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 등 5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은 결코 반도체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이 같은 국내외 비판에 대해 “언제까지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는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겠다. 그리고 내 사재를 보태겠다”고 선언하며 반도체 사업을 가속화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사업추진과 함께 당시 삼성전자 연구원들은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진행했고 마침내 1983년 12월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데 이어 1992년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가 시작된 순간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1994년 256MB D램 △1996년 1GB D램 △2001년 4GB D램 △2010년 30nm 2GB DDR3 D램 △2019년 10nm 8GB DDR4 D램 등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으며, 올해 2분기 기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 43.5%로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이를 토대로 반도체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는 세계 반도체 기술 최강국으로 거듭나게 됐다.

미국, 일본 등 당시 글로벌 IT선진국들의 비웃음에도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임직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을 통해  삼성전자는 현재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업이라는 결실을 맺게 됐다. 사진은 삼성반도체 30주년을 맞아 기념 서명을 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 삼성전자

◇ ‘애니콜’에서 ‘갤럭시’까지… 세계 휴대폰 시장을 지배하다

반도체와 더불어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에 남긴 두 번째 발자국으로 꼽을 수 있는 사업은 바로 ‘휴대폰’이다. 1983년 64K D램 반도체 개발 성공으로 삼성전자는 “우리도 반도체 사업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은 붙었으나 여전히 휴대폰 시장에선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휴대폰 시장은 미국의 모토로라가 점유율 90%를 달성한 상태로 압도적이었다.

1987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신수종 사업을 발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반드시 1명 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휴대폰 사업의 중요성을 예견했다.

1988년 삼성전자는 자사의 최초 휴대폰모델인 SH-100을 선보였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94년 ‘애니콜’ 브랜드 모델인 SCH-700을 선보이며 휴대폰 사업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당시 삼성전자는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우수한 성능’이라는 문구의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 애니콜의 시장점유율은 13%에 그쳤다. 당시 모토로라의 강력한 기세, 차별성이 크게 없는 모델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11.8%에 달하는 높은 불량률 때문이었다.

그동안 ‘불량은 암’이라고 지적해온 이건희 회장은 애니콜의 높은 불량률에 크게 분노했다. 이건희 회장은 “적자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1995년 3월 이건희 회장은 구미 사업장에 150억원 규모에 이르는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쌓은 뒤 불태워버렸다. 11.8%에 달하는 높은 불량률 때문이었다. 당시 슬퍼하는 임직원들에게 이건희 회장은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써라. 고객이 두렵지 않느냐. 비싼 휴대폰 고장나면 누가 사겠는가”라고 다그쳤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의 품질검사는 혹독한 수준으로 올라갔고, 전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최고 품질의 제품을 선보이게 됐다./ 삼성전자

그리고 1995년 3월 이건희 회장은 구미 사업장에 150억원 규모에 이르는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쌓은 뒤 불태워버렸다. 당시 구미 사업장에 모인 2,000여명의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자신이 만든 제품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써라. 고객이 두렵지 않느냐. 비싼 휴대폰 고장나면 누가 사겠는가”라고 임직원들을 강하게 다그쳤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 이후 삼성전자는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1만여 대를 테스트하고 그 중 1대만을 통과시킬 정도의 혹독한 수준의 품질 검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화형식 후 약 5개월이 지난 그 해 8월 삼성전자의 애니콜은 시장점유율 51.5%를 기록하며 국내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애니콜은 1997년 5월 무선 분야 올림픽 공식 파트너로 선정돼 전 세계에 삼성의 브랜드가 알려지게 됐으며, 2009년에는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노키아를 추격하기 시작, 2012년엔 노키아를 제치면서 ‘세계 최고의 휴대폰 기업’이라는 타이틀까지 얻는데 성공한다.

애플의 아이폰을 잡기위해 이건희 회장은 옴니아 모델의 단종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1’를 출시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마트폰 시리즈인 '갤럭시S'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현재 갤럭시 시리즈는 갤럭시S20과 갤럭시 노트20에 이르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스마트폰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 온라인행사 캡처

하지만 그 과정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2007년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대 스마트폰 시대’를 개막했기 때문이다. 대항마로 옴니아 시리즈를 출시했으나 당시 아이폰의 임팩트는 너무 컸고,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또다시 ‘옴니아’ 단종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게 된다. 

그리고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 역사를 바꾸게 될 신제품이 2010년 3월 북미 이동통신전시회 CTIA 2010에서 공개됐다. 바로 삼성전자가 개발한 최초의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1’이다. 삼성전자는 운영체제를 기존의 마이크로소프트 windows mobile에서 구글 안드로이드로 변경하는 모험까지 강행했고, 이는 대중의 접근성을 높인 신의 한수가 됐다.

동세대 안드로이드 기기 중 가장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 갤럭시S1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이는 향후 갤럭시S 시리즈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발판이 됐다. 이후 갤럭시 시리즈는 2012년부터 애플을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섰고, 지금의 갤럭시S20과 갤럭시 노트20에 이르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스마트폰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도체부터 휴대폰까지, 삼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IT산업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이건희 회장은 이제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삼성은 어려움 속에서 위기 극복에 온 힘을 다해야 하며, 국민 경제를 발전시키고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주어진 책임이자 임무”라고 말했던 이건희 회장의 말을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삼성의 임직원들은 깊이 새길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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