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북한의 입이 다시 거칠어졌다. 대남 비방과 우리 정부 인사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29일,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을 강하게 비난한 건 심상치 않은 징후다. 북한이 조선중앙통신을 통한 입장 발표를 ’공화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남 선전 매체 등을 통해 해오던 비방 공세와는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앙통신은 서훈 실장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조선의 청와대 국가안보실 실장이란 자‘로 호칭해 서훈 실장을 겨냥했음을 분명히 했다. 최근 서훈 실장이 워싱턴을 찾아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을 만난 걸 두고 북한은 ”삐걱거리는 한미동맹 불화설로 심기가 불편해진 상전의 비위를 맞추느라 별의별 노죽을 다 부렸다“고 주장했다. ’노죽‘은 북한말로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말이나 표정·몸짓·행동 따위를 일부러 지어내는 것을 일컫는다.

문제는 북한이 서훈 실장에 대한 비방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가 주창해온 ’운전자론‘까지 걸고 든 대목이다. 조선중앙통신은 ”한때 그 무슨 운전자론이요, 조선반도 운명의 주인은 남과 북이요 하며 허구픈 소리라도 줴쳐대던 그 객기는 온데간데없고…“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의 이런 기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잇달아 대남 유화 메시지를 발신했던 것과 차이가 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 연설을 통해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하루빨리 보건위기(코로나19 사태를 지칭)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앞서 9월 12일 자 친서에서도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있는 남녘과 그것을 함께 나누고 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나의 진심을 전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흘 전 보낸 친서에서 코로나19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데 대한 답신이었다.

물론 남북 정상의 친서 교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북측 해역으로 표류한 우리 해수부 공무원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 국민 여론이 들끓자 북한 군부는 궁색한 해명을 내놓았지만 이런저런 의문이 제기됐고,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부처가 진상규명 등을 북측에 요구했음에도 답이 없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당 창건 기념일 대남 유화 메시지가 남한 내 비판여론을 누그러뜨리려는 술책이라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남북관계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냉랭해진 국면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게 문제다. 북한은 ’영변 포기‘ 카드를 협상 테이블에 꺼내놓으면 미국이 대북제재 완화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예상보다 완강하게 나왔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 못 한 김정은 위원장은 빈손으로 평양 귀환길에 올라야 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의 대미 외교라인은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가 훈수를 잘못 둬 대미 협상이 결렬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등을 돌렸다.

지난 6월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주도한 대남 위협 공세와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우리 당국과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여기에 해수부 공무원 사망까지 더해져 대북 여론은 싸늘하게 식은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의 말 몇 마디로 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미동맹에 끊임없는 시비를 걸며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사실 문제를 삼자면 북한의 친중 의존자세도 비판할 구석이 적지 않다. 노동신문의 10월 22일 자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중공군(북한과 중국은 인민지원군으로 표현)의 6.25 전쟁 참전 70주를 맞아 평남 회창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열사능원‘을 참배했다. 

특히 그는 이 능원에 자리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묘지를 찾아 각별한 예를 취했다. 마오안잉은 6.25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인물로 북중혈맹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항미원조‘라는 미명하에 6.25 전쟁에 17개 군단 190만 명의 군대를 투입해 한반도의 전쟁 참화를 격화시킨 게 중국이고, 그 개입을 받아들인 장본인이 북한 김일성 정권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마치 황제를 알현해 주요한 사안의 결재를 받는 변방국의 모습을 자처한 인상까지 드는 대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통치 시기에는 평양에 있는 중국 대사관을 북한 최고지도자가 방문해 중국의 지도부와 북·중 혈맹을 치켜세운 일도 있었다. 식량과 비료는 물론 원유와 생필품까지 지원받는 친중 의존경제로 연명하는 게 북한의 실정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미동맹을 시비 걸며 대남비방을 펼치는 건 자가당착이다.  

북한이 진정한 남북관계의 복원과 협력을 원한다면 먼저 대남비방의 나쁜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던 문제부터 하나하나 차근히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연락사무소 폭파와 한국민 피격 사망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등의 조치가 필수적이다. 북한에 장기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 등 우리 국민 6명의 송환도 조속히 성사돼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목소리에 귀를 닫은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은 언제든 자신이 오케이 하면 남북관계의 문은 열릴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핵 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2018년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 공세를 펼쳤던 상황의 재연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김정은이 한국을 녹록한 상대로 보게 한 건 문재인 정부의 패착이다. 하지만 정부의 대북정책도 국민 지지가 없으면 모래성과 같을 수밖에 없다. 백주에 남북 화해협력과 교류의 상징인 건조물을 폭파하고, 대한민국 국민을 잔혹하게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이 대화와 협력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남북관계의 봄날을 꿈꾸기에 앞서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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