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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의 늦은 수다] 미국 대선 전날에 읽은 ‘비커밍’
[정숭호의 늦은 수다] 미국 대선 전날에 읽은 ‘비커밍’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0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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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미국 대선 전날,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읽다. 2년 전인 2018년 11월에 나온 책.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띈 걸 집에 가져와 잠들기 전 몇 쪽 읽을 요량으로 펼쳤다가 점점 깊이 빠지다. 미셸과 버락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읽다가는 어느 로코(로맨틱 코미디) 못지않게 ‘달달하다’는 느낌을 받다. “마땅히 와야 할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그들의 이상과 지성, 열정, 끈기를 너무나 부러워하다.

미셸은 시카고의 한미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노력 끝에 나름 ‘개천에서 용이 된’ 변호사. 어느 날 버락 오바마라는 “천재급 흑인 하버드 법대생”이 백인 엘리트 일색인 자기네 법률회사 인턴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지만 “백인들은 어느 정도 지적인 흑인 남성에게 정장을 입혀두면 홀딱 반하는 법이지”라며 관심을 보이지 않다. 그러나 이내 “지적으로는 탁월하고 외모는 귀여우며 굵고 진한 목소리가 약간 섹시하기까지 한” 버락과 사랑에 빠지다.

인턴으로 들어온 지 불과 몇 주 만에 써낸 보고서가 워낙 출중해 회사에서 곧바로 ‘전설’이 된 버락은 부와 안락한 삶, 쉽게 명예를 취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소외된 이웃, 가난한 흑인,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해 목소리가 사라진 사람들을 위해 나서다. “더 많은 용이 나올 수 있도록 개천을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버락을 미셸은 “신선하고 관습적이지 않았으며 희한하게 우아하다”라고 묘사하다. “지성과 계획을 중시하는 사람”인 미셸의 눈에서도 사랑의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연상되다.

버락의 활동을 지켜본 미셸은 “불우한 사람들이 지역공동체를 조직하게 하는 것은 ‘싫다’라는 대답을 수십, 수백 가지 방식으로 듣다가 마침내 ‘좋다’라는 대답을 한 번 듣는 것”이라고 표현하다. “마땅히 와야 할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라지만, “당신의 시간과 기부금이 필요하다”는 부탁에는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 그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면 운동이 탄력을 받더라는 뜻. 미셸은 이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버락을 “희박한 확률에 괘념하지 않는 것처럼 회의적인 반응에도 괘념치 않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다. “끈기 있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뉘앙스를 품은 말이라고 생각되다.

미국 대선 전날,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부인 미셀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읽다. 2년 전인 2018년 11월에 나온 책. / 정숭호 제공
미국 대선 전날,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부인 미셀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읽다. 2년 전인 2018년 11월에 나온 책. / 정숭호 제공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현실 정치의 길에 들어선 버락의 높은 윤리 의식과 스스로 정한 윤리 기준에서도 감동을 받다. 미셸은 대통령 취임 직전 버락의 한 모습을 이렇게 남기다. “연방정부가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사와 백악관 단장에 쓸 비용으로 10만 달러를 주게 되어 있었지만, 버락은 우리 돈으로 다 내겠다고 고집했다. 자신의 책 인세를 모아둔 저금을 쓰면 된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돈과 윤리 문제라면 엄청나게 경계했고, 법에 규정된 수준보다 더 높은 기준을 지키려고 했다.” 미셸은 버락의 윤리 기준이 높아진 이유를 “흑인 사회에는 오래된 금언이 하나 있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잘해야 절반이라도 인정받는다. 백악관에서 살게 된 최초의 흑인 가족으로서, 우리는 흑인을 대표하는 존재로 비칠 터였다. 실수나 판단 착오를 하나라도 저질렀다가는 어떻게 침소봉대될지 알 수 없었다”라는 말로 설명하다.

미셸도 버락 못지않은 윤리 기준을 보여주다. 버락이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이 되자 워싱턴에서 초선 의원 부인을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을 미셸은 이렇게 회고하다. “그 해에는 초선의원이 몇 되지 않았다.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정치인과 그 가족은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워싱턴을 드나드는 교통비는 어떻게 지불하는가 하는 문제까지, 앞으로 모든 행동은 엄격한 연방윤리규정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가 로비스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 향후 정치자금을 모금할 때 지켜야할 법적 의무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려니 예상했다. ….” 또 있다. 책 끝부분, 퇴임 직전에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회고하는 장면. “우리는 큰 스캔들 하나 없이 두 번의 임기를 치러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윤리와 품위 측면에서 최고로 높은 기준을 요구했으며, 그 원칙을 끝까지 이어갔다.”

이밖에 정치인의 아내로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되는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 버락의 정계 진출을 반대하다가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 그런 삶의 과정에서 벌어진 둘의 갈등과 화해,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 같은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짧게라도 여기 옮기려다가 독자들이 직접 ‘비커밍’을 읽고 감동을 받겠지라는 생각에 메모만 해두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쓰고 이 글을 마무리할 마음을 먹다. 4년 전 대선에서 힐러리가 승리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당선된 다음날 아침 미셸은 이렇게 기록하다. “깨어보니 축축하고 음산한 아침이었다. 도시 위로 회색 하늘이 걸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장례식이 연상되었다. 시간이 기어가는 듯했다.” 윤리, 품위, 지성, 열정 같은 덕성은 아예 없는 인종주의자, 여성 혐오자, 황금만능주의자 트럼프가 당선된 현실을 ‘흐린 날 치르는 장례식’에 비유한 미셸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다.

책을 덮을 무렵, 내일이 미국 대선 날임을 새삼 깨닫다. 절대로 트럼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회고록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부인이 곧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