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이번 선거는 사기다.”“선거가 조작되고 있다.”“합법적인 표를 집계하면 내가 쉽게 이긴다. 불법적인 표를 계산하면 그들은 선거를 훔치려 할 수 있다.”“누구든 우리 지지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게 놔둘 수 없다.”“월요일(9일)부터 우리 캠프는 반드시 선거법이 완전히 지켜지고 적법한 승자가 취임할 수 있도록 법원에 소송을 추진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 말인지 짐작하겠는가? 투표가 끝난 지 나흘이 지났음에도 아직 승패가 가려지지 않고 있는 미국 대선에 출마한 현직 대통령 트럼프가 내뱉은 말들일세.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고 민망하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선거 조작을 말하고, 개표를 지연시키고, 지지자들의 거리 시위를 독려하고 있는 나라 미국. 자신에게 우호적인 폭스 뉴스마저 민주당 바이든 후보가 과반수를 훌쩍 넘긴 290명의 선거인단을 획득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도 “아직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면서 연방대법원에서 시비를 가리자고 버티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 미국. 한국에서 저런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것도 나라냐’며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을 걸세.

민주주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증오로 얼룩진 이번 미국 대선의 진정한 패자는 ‘미국’이라는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의 말이 옳아. 4년 전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사람이 미국의 쇠퇴를 더욱 더 가속화시키고 있음에도 과반에 가까운 투표자들이 그에게 다시 표를 주는 것을 보면, 미국 고립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담긴 이른바 트럼프주의(Trumpism)가 트럼프 혼자만의 병이 아닌 게 확실해. 그래서 미국의 미래가 더 암담하게 보이고.

그러면 왜 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 과정 전체를 ‘사기’라고 규정하는 트럼프를 계속 지지하고 따르는 걸까?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있는데도 현직 대통령에게 크게 분노하지 않을까? 미국이라는 나라를 공동체의 미래보다는 현재의 욕망 충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친 개인주의자들(rugged individualists)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세. 그들에게 사회는 난폭하고 경쟁적인 시장일 뿐이고, 자유는 그런 시장에서 개인들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자유 그 이상은 아니야.

사회는 없고 오직 서로 경쟁하는 개인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트럼프 같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네. 그래서 중국 전국시대에 맹자가 했던 말은 현재에도 유효한 거고.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 임금 계통 사람이요, 닭이 울면서 일어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척의 무리다.”자신의 욕망 충족만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일종의 도척(盜蹠)이 될 수밖에 없어.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아니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공생을 추구하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 다 큰 도적이야. 지난 몇 년 동안 트럼프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거고. 트럼프는 2017년‘파리협정’에서 탈퇴함으로써 지구의 미래를 훔쳤고, 이제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훔쳐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지. 그러니 ‘선을 추구하는 순 임금 계통’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트럼프의 모습이 애처롭고 추하게 보일 수밖에.

그런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트럼프에게는 스웨덴의 17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한 말이 가장 점잖은 충고인 것 같네. 지난해 12월 미국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툰베리가 선정되자 트럼프는 트위터에서 “너무 웃기네. 그레타는 분노조절 문제를 신경 써야 한다. 친구와 좋은 옛날 영화나 보러 가라. 진정해라, 그레타, 진정해!”라고 비아냥거렸었지. 이번에는 툰베리가 트럼프에게 “정말 웃긴다. 트럼프는 분노 조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친구들과 옛날 영화나 보러 가라. 진정해라 도날드, 진정해라!”고 재치 있게 응수했더군. 옳은 말일세. 74살이면 이제 편히 쉴 나이이지. 뭔가 더 해보겠다는 욕심 자체가 민폐가 될 확률이 높을 나이야(물론 불행하게도 바이든은 79세로 역대 최고령 미국 대통령이 되겠지만…).

지난 5일 저녁(현지 시간)에 백악관에서 우편투표 조작설 등 선거 부정을 주장하던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끝까지 생중계한 CNN(다른 주요 방송사들은 트럼프가 허위 주장을 하고 있다면서 생중계 방송을 중간에 끊었다) 앵커가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허우적거리는 살찐 거북이를 보고 있다. 자신의 시간이 끝났지만 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누구나 욕심이 과하면 추하게 보일 뿐일세. 트럼프처럼 아직도 노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든 분들께 이형기 시인의 <낙화>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끝내고 싶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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