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얼마 전 ‘절친’과 함께 서울 경동시장에서 ‘콩가리’ 냄새가 물씬한 ‘안동국시’를 맛나게 먹은 이야기를 SNS에 올렸더니 “재미나다, 좋다, 나도 가보고 싶다”라고 하신 분들이 제법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고향음식을 먹었다는 감격에 충동돼서 쓴 글인데, 안동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신 분들이지 싶은 분들도 그런 댓글을 달아주셨다.

내친 김에 오늘은 또 다른 안동의 명품 음식 ‘식혜’에 대한 글을 써보련다. 나는 다른 안동사람들처럼 색깔이 빨간 이 식혜야말로 진짜 식혜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안동과 그 부근 사람들을 제외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식혜’라고 알고 있는 허여멀건 음료와 구분해주는 게 글쓰기에 편리하겠다 싶어 여기서는 눈물을 머금고 ‘안동식혜’라고 표기하겠다. 대신 그 허여멀건 음료는 안동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감주’라고 적겠다. (어떤 안동사람들은 깡통에 든 시판 식혜를 ‘캔 감주’로 부르고 싶어 한다.)

안동식혜도 감주처럼 밥을 작은 단지 안에 넣고 엿기름으로 삭혀 만든다. 둘 다 밥알이 귀엽게 동동 떠오른다. 두 음식이 비슷한 점은 여기까지, 다른 점이 더 많다. 쌀알뿐인 감주와는 달리 안동식혜에는 작게 썬 무와 볶은 땅콩이 들어간다. 감주는 마시는 걸로 끝이나 안동식혜에는 씹을 게 많은 것이다. 더 있다. 안동식혜에는 곱게 간 고춧가루도 살짝 들어간다. 그래서 잘 삭힌 안동식혜는 색깔이 곱다.

어쩌다 안동식혜를 처음 접해본 외지 사람들은 “시뻘건 국물에 쌀알이 섞여 있는 게 술꾼들이 한밤중 전봇대 옆에다 뿜어놓은 토사물 같다”고 폄훼하지만 그건 색깔 나쁜 고춧가루로 대충 만들어서 그런 거지, 조신한 며느리가 하얀 앞치마 두르고 정성들여 만든 안동식혜는 주황빛에 가까운 밝은 빨강색이다. 그 말갛고 발간 국물 속에 잘 삭은 고두밥과 가로 세로 1㎝ 이하, 두께 2~3㎜ 정도로 썬 무와 군데군데 약간 탄 듯 볶은 땅콩이 모양 좋고 때깔 좋게 섞여 있다. 맛? 달콤하고 고소하고 시원하고 매콤하고 아주 약간 새콤한 맛도 섞여 있다. 동동 뜬 무와 땅콩을 씹을 때는 아삭아삭한 식감이 이 모든 맛을 몇 갑절 높여준다.

안동식혜는 겨울 음식이다. 여름에는 보관이 안 되니 겨울에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깊어 마당의 우물이 쩡하고 얼어붙을 때 바깥에 내놓은 식혜 단지도 얼어붙는다. 어머니나 누님이 한 사발씩 떠다준 그 식혜에도 살얼음이 가볍게 떠 있다. 온돌방 아랫목에서 형제들이 저마다 이불 속에 발을 밀어 넣고 그 차가운 것을 한 숟가락, 한 모금씩 목구멍 깊숙이 삼킬 때의 그 맛이라니!! 저 위 북쪽 사람들이 꿩고기 넣은 겨울 국수를 찬미하는 이상으로 나는 겨울의 안동식혜를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동국시(좌)와 안동식혜
안동국시(좌)와 안동식혜

경동시장 ‘안동국시’에 대한 글에서 나는 절친 ‘김박’이 해준 “한 민족의 언어는 없앨 수 있어도 그들의 전통 식문화는 없앨 수 없다”는 외국 학자의 말을 다시 인용, 그날 먹었던 안동 국시에 양념을 쳤다. 지금 생각하니 그 양념이 그 글의 맛을 슬쩍 살려준 듯하다. 그 글은 이렇게 흐른다.

<경동시장 지하에 진짜 ‘안동식 콩가리 칼국시’ 명소가 있다고 어느 분이 포스팅한 걸 읽고 김박과 함께 찾아 나섰다. 원래는 거기서 가장 가까운 산인 워커힐 뒤 아차산에라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가볼 생각이었으나 ‘동선’이 안 짜져 바로 경동시장 앞에서 만났다. 명불허전! 안동 촌놈들인 우리는 연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콩가리 냄새 물씬한, 제대로 된 안동국시를 먹게 된 감격을 나눴다. 둘뿐인 엄지손가락으로는 그 감격을 표현하기 부족했다. 인문에 밝은 김박은 “한 민족의 말은 없앨 수 있어도 그들의 전통 식문화는 없앨 수 없다”라는 외국의 어떤 유명 인문쟁이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우리가 안동 콩가리의 그 ‘구시’한 냄새에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급지게 해석했다.>

내 이 글에 한 시인이 “안동 콩가루국수 삼삼도 아니고 심심은 더욱 아니고 슴슴하다는 그 절묘한 맛이라고 해야 맞을까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 댓글에 나는 “삼삼, 심심, 슴슴, 그 어느 것도 아니고 그냥 콩가리 반죽 밀어 숭숭 썰어서 설설 끓는 물에 넣어 삶아주시던 숙모님(우리 집안에서는 최고의 칼국시 명인이시다), 어머님, 그리고 맛나게 자시던 할배, 할매, 백부, 숙부, 아부지, 형님들, 누님들 냄새이지 싶습니다”라고 답글을 붙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향수와 그리움을 음식의 양념 같은 것에 비유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더라. ‘백년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같은 명작을 남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산다’에서 “외갓집에서는 그리움이라는 육수 속에서 맛이 들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수프에 넣을 말랑가는 리오아차 산(産)이어야 했고, 아침에 먹는 이레빠는 폰세카에서 만든 것이어야 했다. …”라고 했고, 마르케스와 친분이 있었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향수’라는 소설에서 “식당에는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화는 수다스러워졌다. 형과 형수는 그가 없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알려 주고자 했다. 지난 몇 십 년이 접시 위로 떠돌고 있었다”라고 썼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아내가 어머니 흉내를 내서 만든 안동식혜 한 사발 떠먹어야겠다. 단지 대신 전기밥솥 안에서 삭은 것이나 모양이 어머니 것과 비슷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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