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5 05:43
[정숭호의 늦은 수다] 매깅스 알아요? 레깅스 말고.
[정숭호의 늦은 수다] 매깅스 알아요? 레깅스 말고.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08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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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용 레깅스를 업계에선 ‘매깅스(Maggings, Man+Leggings)’라고 부른다. 일부 남성 소비자들은 레깅스에 쇼츠(짧은 반바지)를 매치하기도 한다. 사진은 남성용 레깅스를 출시해 인기를 끌고 있는 젝시미스와 안다르 제품들 / 사진 각 사
남성용 레깅스를 업계에선 ‘매깅스(Maggings, Man+Leggings)’라고 부른다. 일부 남성 소비자들은 레깅스에 쇼츠(짧은 반바지)를 매치하기도 한다. 사진은 남성용 레깅스를 출시해 인기를 끌고 있는 젝시미스와 안다르 제품들 / 사진 각 사

나를 포함, 식구가 스무 명 남짓한 친목 단톡방이 ‘레깅스(Leggings)’ 때문에 소란한 적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레깅스 입은 여성의 발목을 촬영했다가 1심 유죄, 2심 무죄를 거쳐 대법원에서 벌금 70만 원과 24시간 교육형이 확정된 한 남자 이야기가 보도된 그날이었지요.

이 단톡방 식구 절대다수는 은퇴한 남성입니다. 그분들 거의가 60대 후반인 나보다도 연상이지요.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이런 ‘나이 든’ 친목 단톡방 대부분이 그렇듯 덕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가벼운 농담과 즐거운 야유도 오갑니다. 예쁜 꽃, 빼어난 경치 사진과 좋은 음악, 영화 이야기는 기본이고요.

살짝 야한 농담도 아주 드물게 올라오는데, 야해봤자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1874~1965)의 말을 빌리면, ‘천박한 난잡성’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한 것들이었습니다. 몸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달과 6펜스’에서 “이들 고상한 보헤미안(런던의 예술가)들의 세계에 정절 같은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 만연해 보이는 천박한 난잡성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잖은 침묵의 휘장으로 우리들의 기행을 가리는 것을 위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썼지요.

‘레깅스 촬영 남성 유죄 확정’ 보도가 난 날, 그 단톡방의 대화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처음 대화를 꺼낸 분이 “근엄하신 법관님들이 레깅스 가지고 왜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하는지요. 우리 법원이 그렇게 할 일이 없는지 궁금하네요. 저 같으면 그 남성을 불러내어 피해자 여성이 보는 앞에서 볼기짝을 서너 대 때려주고 집으로 돌려보냈을 것 같습니다. 참 우습다, 우리 법관님들. ㅎㅎ”라고 시작하자 “아침부터 웬 엉덩이… ㅋㅋ”라는 글이 붙었고, 또 다른 분이 “여자가 기분이 더럽다 하면 게임 끝이야요”라고 올린 글에, 처음 시작한 분이 “유신 때 같으면 레깅스 다 벗어라(입지 마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레깅스를 찾는 남성들이 늘면서 ‘매깅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사진은 각종 온라인쇼핑몰에서 판매중인 남성용 레깅스
레깅스를 찾는 남성들이 늘면서 ‘매깅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사진은 각종 온라인쇼핑몰에서 판매중인 남성용 레깅스

“문제는 레깅스야!”라는 댓글에 “레깅스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찍은 행위가 문제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촬영하면 정상은 아니지요. 레깅스든 비키니든 그냥 눈으로만 흘끔 보는 건 상관없으나 게슴츠레하게 보면 성추행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Look과 Watch의 차이랄까요. 암튼 여름에 선글라스는 필수입니다. (말이 이상하게 흘렀네요. ㅎㅎ)”라는, 이날 대화를 이성적, 지성적, 논리적으로 총정리한 글이 올라오면서 대화가 마무리되려는데, 아래의 댓글이 올라와 이 단톡방은 긴장 상태로 돌입합니다.

“도봉산 바위길 헉헉대며 오르는데 바로 앞에서 젊은 레깅스 서너 짝(6~8脚)이 올라가는 것 보기나 했슈? 그거 안 봤으면 말을 하들 마슈!” 여태까지의 글과 달리 ‘천박한 난잡성’이 여실한 이 글에 기다렸다는 듯 바로 “저는 주로 청계산에서 내려오는 찰싹바지(레깅스)를 만났습니다”라는 댓글이 붙었습니다.

바야흐로 대화가 매우, 더욱, 한층 더 난잡해지게 될 찰나, “대학에서 톡방의 이런 대화가 문제 된 경우가 많습니다. 농담인 줄 알고는 있지만, 요즘은 이런 게 농담으로 치부되지 않습니다. 아주 말씀을 조심하셔야 하는 세상입니다”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단톡방 식구 중 몇 안 되는 여성으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분이 쓴 이 글이 뜨자 “저 근지러운 입을 여태 어떻게 참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시덕거리던 남자 식구들의 입이 일순에 얼어붙었습니다.

곧바로 “내가 많이 심했네. ○교수님 외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라는 사과가 올라왔는데, 물론 도봉산에서 레깅스가 어쩌구저쩌구 내뱉은 사람이 쓴 겁니다. 당황하고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가 술을 마신 상태였다면 화들짝 술이 깨서 급하게 쓴 글 같았습니다.

이제 고백해야 할 때가 됐는데, 그날 도봉산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였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도봉산과 북한산을 주 1회꼴로 오르고 있는 나는 산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들을 자주 봅니다. 처음에는 눈 둘 데가 없어서 민망했는데, 여러 번 보게 되니 남자들이 레깅스를 입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들이 여자들의 레깅스 차림을 보고 민망해하듯, 남자들의 레깅스 차림을 보면 여자들도 민망해지겠지”라는 생각도 들었고, “여자들은 레깅스가 편해서 입는다는데, 남자들도 저거 입고 산에 오르면 참 편하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땀이 많은 편인 나는 “땀 때문에 바지가 다리에 감기는 걸 막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지요.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 대법원판결과 레깅스에 대한 설왕설래가 시작된 단톡방에 들어갔으니 안 끼어들 도리가 없었고, 뱉은 말 때문에 ‘음란 마귀’로 찍히기 직전에 준엄한 경고를 받은 겁니다. 어쨌든 그날 일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그런데 요 며칠 새 시도 때도 없이 내 컴퓨터 모니터에 ‘레깅스’ 광고가 날아들어 귀찮아 죽겠습니다. 내가 컴퓨터로 ‘레깅스’를 검색한 걸 알고 ‘알고리즘 기반 광고’라는 신기술을 장착한 장사꾼들이 광고를 마구 날려 보내는 거지요. 사실 나는 레깅스를 사려고 검색한 게 아니라 이 글을 쓰려고 검색한 건데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레깅스 검색에서 레깅스를 찾는 남성이 날로 늘어나 남성용 레깅스에 ‘매깅스(Maggings, Man+Leggings)’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강동원같은 탤런트급 몸매가 아니면 매깅스 입지 마라. 매깅스 입을 때는 반드시 속옷을 입어야 하고 겉에도 반바지를 입는 게 덜 민망해 보인다”라는 안내도 있었습니다. 오늘 글은 레깅스와 매깅스를 나만큼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