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한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2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뉴시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임대차 3법 시행 직전 아파트 전세보증금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 29일 경질됐다. 사진은 사임한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2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는 모습. / 뉴시스

지금 만 열 살, 4학년이 된 손녀 이야기 먼저 할게요. 아이가 여섯 살도 안 됐을 때, 제 엄마가 동영상을 보내줬습니다. 애가 설거지를 하는 게 담겨 있었어요. 엄마가 끌어다 놓아준 식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앞치마를 두른 채 접시와 그릇을 헹구는 아이 모습이 나름 꼼꼼하고 야무졌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어 하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재미는커녕 힘들고 불편한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이는 엄마가 묻는 말에 대답합니다.

“우리 어린이, 설거지 재미있어요?”

“재미있어서 하는 거 아녜요.”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 얼굴에는 땀방울도 맺혀 있었습니다.

“그럼 왜 설거지하겠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꿈을 이루려면 어려운 것도 해내야 한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요.” 아이는 엄마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합니다. 요리사가 되는 게 아이의 꿈이지요. 설거지는 어렵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누가 그랬어요?”

“소렐 로렌슨이요.” 아이는 한참 빠져 있던 영국 만화에 나오는 아이 이름을 댔습니다. 나는 손녀 옆에 앉아 로렌슨과 여동생이 주인공인 TV만화를 몇 번 봤는데, 그 영국 꼬마는 동생을 살피고 부모와 선생님과 친구들을 대하는 게 여간 속 깊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 동영상을 보고 쓴 ‘초심이여, 왜 변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이 아이, 이 귀엽고 똑똑한 것, 세상에서 오직 착하고 예쁜 것만 빨아들이는 이 아이도 이제 금방 ‘미운 일곱 살’이 되고, ‘중 2’가 되어 저토록 사랑하는 엄마에게 대들고 아빠를 비웃으며, 북한의 김정은도 무서워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초심은 왜 변하는지!”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가 경질됐습니다. 지난해 7월 전월세상한제 시행 직전 자기 강남아파트 전세를 대폭 올린 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 정권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 같은 내로남불을 저지른 게 이미 숱하게 드러났지만 국민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이는 김상조일 겁니다. 그는 이 정권이 무려 스물다섯 번이나 내놓은 부동산 대책 거의 전부에 관여했습니다. ‘6·17대책’을 내놓은 지난해 6월에는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어 8월에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고도 말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막겠다는 그의 어록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이러던 그가 전월세 인상률을 5%로 제한하는 전월세상한제 시행을 불과 이틀 남긴 날 서울 청담동에 있는 자기 아파트 전세를 14%나 올렸으니 국민이 충격을 받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거기다가 ‘청렴’이 경쟁력이었던 그가 부인과 함께 잔액 14억 원이 찍힌 통장을 갖고 있는 현금부자라는 사실까지 알려졌으니 사람들은 그가 과연 알려진 만큼 청렴했을까 의심까지 합니다. 그가 일으킨 충격은 전 법무부 장관 조국이 던진 충격에 버금가거나 강도가 더 크지 싶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어제 하루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겁니다.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대통령은 김상조를 청와대에서 내보내고 바로 ‘반부패정책협의회’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 “멈추지 말고, 정치적 유불리도 따지지 말고 끝까지 파헤쳐 주기 바란다.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벌하고, 부당이익을 철저하게 환수해야 한다. 차명거래와 탈세, 불법자금, 투기와 결합한 부당 금융대출까지 끝까지 추적해 달라”고 했습니다.

부동산 투기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으니 국정을 맡은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한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김상조에 대한 유감을 한마디만 했어도, 그동안의 부동산 정책이 힘을 쓰지 못했다는 반성을 발언 앞이나 뒤, 가운데 어디에든 짧게라도 넣었더라면 어제 회의가 ‘선거용 쇼’만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정권, 처음 출범 때와는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초심은 변한다고 하지만 너무 변했습니다. 출발 때의 당당함, 정의와 공정, 공평을 이루겠다는 정권의 초심은 접시에 부어놓은 휘발유처럼 벌써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니,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정권 담당자들의 비리와 부정, 부패-공직자 윤리의 망각 혹은 포기를 포함한-를 보면 애초부터 이들에게 초심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조의 경질을 두고 “공정을 외친 위선의 퇴장”이라는 한 신문 제목에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공정을 외친 위선”에 이 정권의 모든 어두운 것이 담긴 것 같아서요.

**집으로 돌아간 김상조. 어쩌면 속은 후련할 겁니다. 더 이상 국민은 물론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나의 비리는 언제 터질까” 걱정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