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미국이 대북제재의 고삐를 더 바짝 죄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워싱턴의 새 대북정책이 깐깐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달라진 기류를 접한 북한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어 보인다. 대북접근 수위와 속도를 북미 정상회담 등 현안 및 정책 노선에 따라 조절했던 트럼프 행정부 때와 달리 원칙에 따라 밀어붙이는 방식의 조치가 속속 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재 위반 혐의를 받아온 북한 사업가나 거래 협력자 등을 추적 또는 체포하려는 움직임이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은 그중 하나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대북제재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싱가포르 국적의 60대 남성 궈기셍(Kwek Kee Seng)을 4월 하순 수배했다. FBI는 홈페이지에 공개 수배 사실을 알리며 사진 2장과 생년월일, 신장·체중 등 인적사항을 공개했으며, “북한과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제재 대상인 서비스를 북한에 제공함으로써 핵 개발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했다”고 혐의를 적시했다. 또 “북한에 불법적으로 석유를 반입토록해 북한 당국 및 기업에 핵심 자원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궈기셍에 대한 수배가 눈길을 끄는 건 앞서 말레이시아 당국으로부터 북한 사업가 문철명을 인도받은 미국이 ’사람‘을 쫓는 쪽으로 제재 이행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7일 말레이시아 당국은 싱가포르 등을 무대로 활동한 북한 국적 사업가인 문철명을 미국 사법당국에 인도했다. 

그러자 북한은 이틀 만에 외무성 성명을 내고 “공화국(북)을 고립 압살하려는 미국의 극악무도한 적대시 책동과 말레이시아 당국의 친미 굴욕이 빚어낸 반공화국 음모결탁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단교조치라는 초강수를 뒀다. 여기에 말레이시아도 외교관 맞추방 형태로 대응함으로써 북한과 말레이시아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문철명 신병인도와 궈기셍 수배는 미국의 대북제재가 북한 국적의 사업가 뿐 아니라 북한에 협력하거나 대북제재의 감시망을 회피해 도움을 준 제3국 사업가나 업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문철명이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그가 말레이시아 당국으로부터 670일 동안 구금된 상태로 조사 받는 상황을 파악해 미국 법정에 세우려 총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신병확보와 조사를 통해 북한 당국의 제재회피 수법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다른 기업이나 협력자가 미국 법원으로부터 중형을 받는 것을 우려해 북한 관련 사업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업가로 위장해 온 북한 공작원이 중형을 피하려 미국의 수사에 협력하거나 망명하는 경우 북한 당국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와인이나 사치품, 최고위층의 기호품 등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아온 문철명이 배신한다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서는 악몽이다. 미국 당국의 회유나 심경 변화 등에 의해 문철명이 수사에 협력하거나 ’플리바겐(사전형량 조정제도)‘을 통해 거래에 나설 경우 더 곤혹스런 입장에 처할 공산도 크다.

미국 뿐 아니라 서방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망도 촘촘해지고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분위기다. 캐나다는 지난 23일 대북제재 위반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작전명 ’네온‘의 활동을 2023년 4월 말까지 2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캐나다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북한이 원유 밀반입에 쓰는 수법인 공해상에서의 선박을 이용한 환적행위 등을 감시하는데 함정이나 군용기, 관련 인력 등을 계속 배치해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마르크 가르노 캐나다 외교장관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는 북한이 진로를 바꾸고 대량살상무기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라며 네온작전의 연장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이 같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참여 움직임을 더욱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도 속속 내놓고 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지난 28일 보도한데 따르면 미 국가정보국(DNI)은 북한·중국·러시아·이란 등 적대 성향 국가의 악성 행위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을 국가정보국장실 산하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중국 등 이들 4개 국가는 세계적인 코로나19 창궐 속에서도 미국과 동맹을 희생시켜 이익을 추구하는 주요 위협이라는 게 미 당국의 평가다.

이런 미국의 움직임에 북한은 뾰족한 대응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당초 북한은 바이든 당선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 해외 외교공관에 미국을 자극하는 언동을 삼갈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차별화된 대북정책을 내놓는 과정을 지켜본 뒤 대응 전략을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나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의 대북정책이나 제재 조치 등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이내 침묵모드로 돌아선 상황이다. 그만큼 대처방법과 관련한 고민이 깊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을 입에 올리면서 체제 내부의 긴장도를 올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8일 폐막한 노동당 세포비서대회에서 “나는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 각급 당 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런 발언은 2012년 4월 김일성광장에서 행한 취임 후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배치된다. 

물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통치활동을 전개하면서 상황변화에 따라 ‘허리띠를 다시 조이자’는 식의 언급을 하기도 했지만, 아예 고난의 행군을 공식 언급한 건 주목할 일이다.

고난의 행군은 본래 북한에서 김일성의 이른바 항일 빨치산 활동 과정 중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이동한 것을 지칭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이듬해인 1995년 대홍수와 이후 수 년 간에 걸친 대기근으로 대량 아사자가 발생한 시기를 일컫는 표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200~30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주장이 있고, 우리 관계당국도 46만 명이 아사했다는 정보 판단을 갖고 있을 정도로 북한 체제에 준 충격은 컸다. 북한 엘리트와 주민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고난의 행군 돌입을 선언한 건 그만큼 북한 체제의 안팎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얘기다. 최고지도자가 신세대 청년들의 옷차림이나 언행 등을 거론하면서 ‘반(反) 사회주의 투쟁’을 강조해야 할 정도로 체제 전반에 변화와 동요의 움직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개조사업’까지 촉구하는 김정은의 연설에서는 대북제재와 코로나19라는 파고 속에서 내부로부터는 변혁을 압박받는 다급한 상황이 감지된다.

그동안 북한 체제는 위기대응 능력이 탁월한 체제로 간주됐다. 김일성·김정일 사망 당시 체제붕괴론이 있었지만 견뎌냈고, 미국의 제재와 압박에도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했고, 대량 아사사태에도 굴함이 없었다는 측면에서다. 

하지만 최근 북한 체제를 뒤흔드는 복합적인 위기요인은 이전과는 사정이 달라 보인다. 무엇보다 대북제재의 강도와 지구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북한이 한계를 노정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결국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카드까지 꺼내들었지만 엘리트와 주민은 이미 너무 많은 변화의 욕구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은 우리를 버리다시피 했지만 장마당은 먹을 해결해 준다”는 북한 민초들의 인식은 자칫 체제이반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김정은 리더십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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