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니스트
하도겸 칼럼니스트

우리말에 ‘꽃잠’이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꽃향이 풍기는 가운데 잠인지 잠결에 꽃향기를 맡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가슴이 설레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을 듯 싶다. 사전적으로는 결혼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잠을 말한다고 한다. 흔히 방금 혼인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잠자리를 우리는 ‘첫날밤’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원래 뜻은 ‘모처럼 깊게 잘 잔 잠’의 뜻이 맞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첫’이라는 말이 어느새 우리에게는 식상해 지고, 대신 쓸 수 있는 말들에 대한 작은 욕구가 생겨난다. 애틋하고 설레는 그런 느낌을 담아내는 말로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그 잠자리를 우리 옛말로 ‘꽃잠’이라 붙여준 것 같다. 그 어떤 불쾌감도 없어야 하는 표현 가운데 우리 선조는 ‘꽃’을 선정한 것이다. 참으로 시적인 말로 이런 단어를 접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작은 행복은 아닐까 싶다.

그런 행복을 주는 모임 가운데 코로 19로 거의 없어진 와인 모임을 들 수 있다. 잘 모르고 접하는 와인의 향에는 수많은 꽃이 잠들어 있다. 술병을 따고 부으면서 깨어나는 이국의 꽃향기는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해준다. 그러나 와인에 취한 사람은 약도 없나보다. 다음날의 숙취는 와인으로의 발길을 잡는다. 우리의 막걸리는 어떤가?

탁주라고 불리며, 투명도 등으로 와인에 비해 시각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라고 하지만 볼수록 아름다운 볼륨감과 연한 미색의 맛깔스러움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꽃이 아름답겠지만 우리의 전통주 막걸리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투명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 아닐 듯 싶다.

사진은 꽃잠보다 두 번 더 발효하는 청주 ‘여여’를 반생반숙, 즉 찬물과 끓는 물을 교차로 사용하는 밑술작업을 하는 송승훈 대표의 모습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사진은 꽃잠보다 두 번 더 발효하는 청주 ‘여여’를 반생반숙, 즉 찬물과 끓는 물을 교차로 사용하는 밑술작업을 하는 송승훈 대표의 모습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막걸리는 신토불이의 이점을 살려 우리 몸에 맞는 나아가 좋은 술로 근래 각광을 받고 있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배를 채워주는 포만감 가운데, 건강과 전통 그리고 과거에의 향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약간 신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다양한 맛과 재료로서 그리고 향으로 성큼 다가온 우리의 막걸리에도 한 가지 큰 약점이 있었다. 다름 아닌 술 마신 다음날의 숙취로, 와인에 버금간다.

얼마 전 숙취가 덜한 우리의 증류 소주를 음미하는 가운데 마셔도 숙취가 없는 막걸리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십년동안 막걸리를 사랑해왔던 한 사람으로 매우 기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게 들렸다. 그래서 평소에 전혀 쓰지 않는 “정말?”이라는 말이 오랜만에 튀어 나왔다. 워낙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권해주었기에 믿고 마셔 본 그 막걸리는 약간 신맛이 풍기는 감칠맛으로 정말 혀와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맛과 풍미에 취해 평소보다 더 마신 다음날 놀라울 정도로 정말 숙취가 없었다. 나른한 봄날의 한바탕의 ‘꽃잠’을 꾼 나비가 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한 청정지역.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에도 우리의 ‘꽃잠’이 있다. 아름다운 칠선계곡과도 가까운 이 마을에는 ‘꽂잠’을 만드는 지리산 옛술도가가 자리 잡고 있다. 직원없이 부부 둘이서 막걸리를 빚는 아주 작은 도가의 송승훈 대표를 찾아 ‘숙취’가 없는 이유를 물었다.

쌀알 표면의 단백질과 지질은 밥짓기에는 아주 좋은 영양소이나 발효과정에서는 숙취, 잡맛, 이취의 원인이 되는데, 물을 바꿔가며 쌀알이 깨지지 않게 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어내어 발효에 불리한 성분은 말끔히 제거하는 ‘백세’를 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금주령’을 거치며 우리가 잊고 지냈던 선조의 지혜를 오늘에 되살린 백세 장수의 핵심 기술이어서 더욱 기뻤다. 자주 시간을 내어 다시 ‘꽃잠’을 청해야겠다. 잠을 잘 자야 우리네 삶이 생동하듯이, 좋은 술을 마셔야 힘들수록 우리네 인생이 더 깊어질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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