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프랑스 포도주가 성공한 이유는 ‘스토리’를 입혔기 때문이라지요. 프랑스 무슨 지방의 햇볕과 토양, 물맛이 서로 작용해 환상의 맛을 빚어냈다는 것에서부터 어떤 왕이, 어떤 왕녀가, 어떤 귀족이 이러이러한 사람과 저러저러한 곳에서 그러그러한 때에 맛보고 황홀해 했던 포도주라느니 등등 별별 것들이 포도주의 스토리가 됐잖아요. 

포도주 이야기가 넘치면서 ‘포도주’보다 ‘와인’이라고 말해야 포도주와 포도주 스토리를 좀 아는 사람인 것처럼 됐지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와인 스토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고 각오한 서른 명이 50만원씩 내서 한 병에 1,500만원 가는 무슨 초고가 포도주를 사서는 각자 병아리 오줌 만큼 시음을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들은 적 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추리고 추려도 엄청 두꺼운 책을 만들 만큼 쌓인 포도주 이야기에 덧붙일 게 하나 있습니다. 내 이야기인데, 친지들과 포도주를 마시다가 재미삼아 풀어놓으셔도 될 만하지 싶습니다. 마음껏 각색해서 옮기시라고 아주 자세하게 쓸 요량이니 길어지더라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올 4월 부엌 수납장을 정리하는데 포도주 두 병이 나왔습니다. 사진을 찍어뒀는데, 라벨이 지저분한 오른쪽 것-무려 62년 전인 1959년산 ‘샤또 라뚜르(Chateau Latour)’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27년 전인 1994년 초, 내 첫 직장인 한국일보는 창간 40주년을 맞아 미국과 유럽, 동남아에 각각 10명으로 구성된 특별취재단을 순차적으로 보냈습니다. 현지에 1~2개월 머무르면서 쓰고 싶은 기사를 마음껏 쓰라는 게 미션이었던 이 취재단은 대외적으로는 당시 좀 위축됐던 한국일보 사세를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기자들을 해외로 가급적 많이 보내 경험을 쌓게 하고, 격려하려던 게 목적이었습니다. 목적이 목적인만큼 예산도 넉넉히 배정됐습니다. 동남아팀이 귀국하면 중국, 중남미, 아프리카 취재팀도 떠날 계획이었으나 경영진에 문제가 생겨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장 먼저 떠난 미국팀 취재반장이었습니다. 신문사 연조도 좀 된 데다 미국에 살았던 경험 때문에 그렇게 인선이 된 건데, 1993년 12월 말일에 떠난 미국팀은 두 달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뉴욕을 출발, 재미 한인사회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미주한국일보가 있는 LA까지 달리는 2주간의 대륙횡단을 계획했습니다. 뉴욕에서 GM 밴 두 대를 렌트해 떠나려는데 LA의 ‘회장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미주한국일보 설립자이자 한국일보 오너 형제 중 한 명인 그는 “미국에 수십 년 살았어도 대륙횡단은 해보지 못했다. 괜찮다면 밴에 자리 하나만 만들어 달라”라고 ‘명령’했습니다. 회장님은 다음날 비행기로 우리의 첫 번째 숙박지인 워싱턴으로 날아와 대륙횡단팀에 합류했습니다.
 
워싱턴을 떠나 애틀랜타, 몽고메리, 뉴올리언스, 댈러스, 산타페, 피닉스 등등을 거쳐 ‘베가스(라스베이거스)’에 왔습니다. 도박도시 베가스의 호텔 도박장들은 돈이 좀 있는 사람에게는 도박장에서 돈을 더 많이 잃도록 하려고 호텔방을 공짜로 내줍니다. VIP는 꼭대기 층 스위트로 모십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베가스 도박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딜러들은 LA한국일보에 ‘호텔과 식음료는 공짜’라는 광고를 내서 한국인 손님을 불렀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우리가 이동하며 모텔을 예약했는데, 베가스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됐습니다. LA한국일보 광고국에서 ‘데저트 인’이라는 호텔의 한국인 딜러를 통해 무료로 방을 쓰게 해준거지요. 그 딜러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서 공짜 방을 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분 덕분으로 우리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고급 호텔-가건물 같은 모텔이 아니라-에서 하룻밤을 자게 됐습니다.

‘데저트 인’ 호텔 / 위키미디어
‘데저트 인’ 호텔 / 위키미디어

‘데저트 인’ 호텔은 1960~70년대 미국 최고 갑부이자 세균에 감염될까봐 비서 외에는 사람 대면을 극도로 기피했던 전설적 은둔 생활자 하워드 휴즈(1905~1976)가 사들여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호텔입니다. 원래 베가스 호텔 중 최고급이었던 데저트 인 꼭대기 층을 통째로 빌려 머물던 휴즈는 호텔 측에서 자기를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이 호텔을 아예 매입해버리는 정도는 약과였던 진짜 미국 부자였습니다. 로비 바로 뒷문이 환상적인 18홀 골프코스로 바로 연결된 이 호텔을 말입니다.

데저트 인에서는 우리 일행에게 객실 다섯 개와 꼭대기 스위트를 내줬습니다. 객실은 취재단 열 명이 쓸 것이고, 스위트는 ‘회장님’ 것입니다. 딜러가 호텔 측에 ‘회장님’을 ‘VVIP’로 소개한 모양입니다. 나한테 배정된 방에 짐을 풀어놓고 회장님 뵙는다는 핑계로 베가스의 스위트 구경을 갔습니다. 오래돼서 상세한 기억이 안 나지만 호화로웠습니다. 침실이 여러 개였고 벽지와 가구는 프랑스 왕실 풍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기행으로 한국 신문 해외 가십 란에 수시로 등장하던 세계 제일 부자 그 유명한 휴즈가 쓰던 방이 그 방이라는 건 그땐 몰랐습니다. 

내가 좀 뻔뻔스럽습니다. 이 값비싸고 호화로운 방을 구경만 할 게 아니라 하룻밤 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께 “저, 오늘 여기서 자도 되지요? 저게 전부 빈 방이네요. 회장님 아니면 제가 언제 베가스의 스위트에서 자보겠어요?”라고 했더니, 회장님은 씩 웃더니 “그러쇼. 취재반장인데”라며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짐을 갖고 다시 스위트로 돌아와 거실의 금장 소파에 앉으니 화려한 테이블 위에 그것만큼 화려한 과일바구니가 보였습니다. 청포도 흑포도 홍포도 오렌지 사과 복숭아 하니듀 칸탈로프와 여러 종류의 치즈와 육포가 가득한 바구니에는 포도주도 한 병 있었습니다. 이 글 맨 앞에서 말한 1959년산 샤또 라뚜르였습니다. 영화(특히 007시리즈)로, 책으로 오래된 포도주 귀한 걸 아는 나는 한 번 더 뻔뻔스러워지기로 했습니다. “회장님, 이거 저 주세요. 회장님 술 안 드시잖아요.”

이리하여, 내 눈에 띄기 35년 전, 즉 내 나이 여섯 살 때 프랑스 보르도의 뜨겁고 밝은 태양 아래에서 익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나의 와인 스토리 어때요? 재미있지요? 하지만 아직 안 끝났어요. 좀 더 해야 끝납니다.

나는 아직 포도주를 즐길 줄 모릅니다. 시금털털한 맛밖에 못 느껴요. 붉은 포도주가 심장에 좋다는 게 대단한 건강정보로 유통될 때는 운동 안하는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지요. 또 마시다가 남겨두면 산화한다는 지식도 주워들은지라 1959년산 샤토 라뚜르는 한국에 와서 내 집 거실장 다른 양주병 사이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전용 셀러(Cellar)에 넣지 않고 아무데나 오래 두면 변질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으니 이 포도주는 주인 잘못 만나 학대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장식장에 들어 있던 이 술은 이사 몇 번 다니는 사이 찬장으로, 수납장으로 위치가 바뀌면서 내 눈에 띄지 않게 되었고, 관심에서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부엌을 정리하던 중 라벨이 더러워진 채 다른 포도주 한 병과 함께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이 포도주가 우리 집에 오게 된 과정을 쓰면 재미있는 글이 되겠다 싶어 사진부터 찍어 놓고 차일피일하고 있는데, 더 재미난, 그리고 슬픈 일이 일어나 쓰는 걸 더 미루면 안 되게 됐습니다. 

한국 기업 폴란드 현장에서 일하는 둘째 사위가 휴가를 받아 귀국했습니다. 며칠 전 우리 집에서 사위와 딸, 9월이면 만 세 살이 되는 귀엽기 이를 데 없는 셋째 외손녀와 함께 거실에 접이식 교자상을 펴놓고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사위에게 이 포도주를 보여주고 싶어졌습니다. 왕년의 내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포도주가 생기게 된 이야기를 해주고 큰딸 부부까지 다 모이는 날 같이 마시자며 상 위에 올려놨는데, 딸이 포도주 이름과 생산 연도를 검색하고는 놀라서 외칩니다. 

“아빠, 대애애박! 이거 300만원도 넘는다는데? 1959년산 샤또 라뚜르!” 사위도 흥분해서 “어디 봐!”하면서 전화기를 받아들더니 “어 정말!” 하고는 금방 목소리를 낮춰 “상태에 따라 값이 다르다. 최상은 300이지만 아무렇게나 보관했으면 식초라는데?”라고 덧붙입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은 아내가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그래도 귀한 거는 맞네. 진작 잘 보관할 걸”이라고 한마디 거듭니다. 사위가 다시 “아버님, 따지 말고 보관하세요. 어쨌든 귀한 추억이잖아요”라고 합니다.  

폴란드에 혼자 있던 사위는 이번에 가족을 다 데리고 돌아갑니다. 혼자 있어 제일 싫은 게 “애가 제일 귀엽고 예쁠 때 보지 못하는 거”라고 하더니 같이 가기로 한 겁니다. 이제 막내 외손녀를 오래 못 보게 된 아내가 “쟤 보고 싶어서 어떡하나!”라고 말하니 딸은 “페이스톡 자주 하면 되지 뭐”라고 합니다. 아내와 딸이 이렇게 이별을 아쉬워하는데 … … …, 갑자기 “퍽” 소리가 났습니다. 포도주 병이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였습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나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 서울과 용인으로 거처를 옮긴 샤또 라뚜르가 62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 소리였습니다. 손녀가 왔다가다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병을 친 거지요. 낮은 상이라 굴러 떨어져도 웬만해서는 안 깨질 텐데, 유리가 너무 오래돼 삭았던 모양입니다. 딸이 “아빠! 어떡해 어떡해!” 발을 구르고, 사위는 손녀가 파편을 안 밟도록 뒤로 물러나게 한 후 휴지 따위로 닦아내다가 바닥에 흥건한 포도주를 찍어 맛을 봅니다. “아버님, 약간 식초 같기는 하네요”라고 나를 달랩니다. 

다 치우고 난 후, 내 표정이 아까와는 달라졌는지 사위가 날 쳐다보고는 “아버님, 칠순이 내년이지요? 폴란드 오세요. 제가 휴가 낼게요. 오스트리아 거쳐 이탈리아 프랑스 구경 같이 떠나시죠”라고 합니다. 내년에 거기 다녀오면 1959년산 샤또 라뚜르에 얽힌 이야기는 더 길어지겠네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가스에서 나는 블랙잭으로 잠깐 사이에 20달러를 잃었습니다. VVIP 우리 회장님은? 스위트에 올라왔더니 TV를 보고 계셨습니다. 나도 잠깐 옆에 앉았다가 침실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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