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테크놀로지(Lost technology)’. ‘잃어버린 기술’이라는 단어적 의미처럼 주로 과거에 이용됐지만 현재는 모종의 이유로 사라진 기술들을 의미한다. 현재 사라진 기술들은 대체기술 등장으로 인한 시장경쟁력 확보 실패부터 국가의 지원 부족으로 개발이 중단된 아쉬운 기술까지 매우 다양하다. 특히 하루하루 기술의 주도권이 달라질 정도로 빠른 변화를 거듭하는 현대 사회에서 로스트 테크놀로지의 등장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치부된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현재 사라진 기술들을 살펴보고, 이것이 앞으로 과학기술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살펴보는 자리를 가졌다. <편집자 주>

과학기술 역시 생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당하고 만다. 특히 변화가 빠른 이동통신시장에서는 오늘 흥행한 기술이 다음날 사라지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피처폰, 삐삐, MP3처럼 말이다./ 그래픽=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1864년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인 ‘적자생존(適者生存)’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무리가 살아남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곧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도태되고 멸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적자생존은 ‘이동통신시장’에서 통용되기 적절한 용어가 아닌가 싶다. 오늘 밤까지 대세였던 기술이 다음날 아침이면 신기술에 밀려 도태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첨단 통신 시장은 수많은 ‘멸종된’ 기술들의 잔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종하게 된 통신기술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

◇ 휴대전화의 먼 조상님, ‘삐삐’

한 때 번성기를 누렸지만,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멸종된 대표적인 통신기기를 하나 뽑으라면 역시 ‘무선호출기’를 꼽을 수 있겠다. 

무선호출기는 호출 전용의 소형 휴대용 수신기의 일종으로, 우리에겐 수신음이 ‘삐삐’ 울린다고 해서 일명 ‘삐삐’로 더욱 잘 알려진 기기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정식 명칭이 ‘페이저(Pager)’였던 영미권에서도 호출기가 울리는 소리에 빗대 ‘비퍼(Beeper)’라는 명칭으로 더욱 많이 불렸다.

송신(메시지나 전화 등 통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안되고 수신만 할 수 있는 단방향 통신기다. 무선호출기 이용자들은 일반 전화기로부터 약 20자 정도의 텍스트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보면 상당히 불편한 것 같지만 공중전화, 집전화 등으로만 소통이 가능했던 당시엔 매우 유용한 통신수단이었다.

'삐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선호출기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진=Gettyimagesbank

무선호출기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인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2년 기간통신사업자 KTA(한국전기통신공사: 현재의 KT)가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1992년부터 무선호출기 통신망이 전국적으로 광역화됐고, 이용 가능한 주파수도 160MHz 대역에서 322∼238.6MHz로 확대됐다. 

또한 1993년부터 해외 호출이 가능한 글로벌 서비스까지 시행되면서 전국 통신 시장은 ‘삐삐’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실제로 전범수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가 작성한 ‘무선호출 서비스 도입과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변화(2009)’ 논문에 따르면 1997년 기준 가입자 수가 1,500만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선호출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무선호출기는 폴더폰과 같은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통신시장에서 사실상 멸종되고 말았다./ 사진=Gettyimagesbank

◇ 피처폰, ‘삐삐’를 멸종시키다

하지만 1997년에 들어 1.8 GHz 대역의 CDMA 기술을 이용한 개인휴대 통신 서비스(PCS)인 ‘시티폰’이 등장하면서 무선호출기 시장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20자 정도의 텍스트 메시지와 연락처만 수신할 수 있었던 무선호출기 대신, 실시간으로 통화가 가능한 시티폰에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1991년 서비스를 시작한 2세대 이동통신 ‘2G’가 199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시티폰에 이어 본격적인 ‘피처폰’의 시대가 시작됐다. 기존 휴대폰보다 훨씬 가볍고 문자메시지, 휴대용 카메라 기능까지 갖춘 2G폰은 순식간에 통신기기 시장을 장악했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무선호출기는 결국 2000년대 초 시장에서 사장되고 말았다.

2000년대 초 통신 시장에서 무선호출기를 완전히 몰아낸 피처폰은 대대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내외 이동통신시장에서 피처폰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매우 거대해져갔고, 핀란드 노키아, 미국의 모토로라 등 글로벌 IT대기업들은 피처폰 출시에 열을 올렸다.

피처폰 시장이 커지면서 쏟아져 나오는 제품들 역시 어마어마했다. 지금보면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100만화소라는 엄청나게 높은 고화질 카메라와 게임, 음악 재생 등 수많은 기능들을 장착한 피처폰들은 통신 기기 상가에서 고객들을 유혹했다.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현재 글로벌 최대 규모의 IT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피처폰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LG전자는 ‘초콜릿폰’과 ‘프라다폰’ 등 명작 피처폰을 쏟아내며 2000년대 중반까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피처폰 기업’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막강한 피처폰의 왕국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아이폰의 등장. 사진은 2007년 1월 29일 애플의 전 CEO 스티브잡스가 세상에 아이폰1을 최초로 공개하는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 ‘아이폰’의 등장, 그리고 피처폰의 몰락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피처폰의 시대는 2007년 1월 29일을 기점으로 종말의 길을 걷고 말았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무대 위에 등장한 남자, 바로 애플의 창업자이자 전 CEO인 고(故) 스티브잡스가 이날 공개한 스마트폰 ‘아이폰’이다.

당시 아이폰을 최초 공개한 행사에서 스티브 잡스는 “오늘 우리는 터치로 조작할 수 있는 와이드 스크린의 패드를, 획기적인 인터넷 통신기기를, 그리고 새로운 휴대전화의 3가지 기술을 선보이려고 한다. 이는 3개의 제품이 아닌 단 하나의 제품, ‘아이폰’이다”라고 소개했다.

애플이 휴대폰을 ‘재발명’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스티브 잡스의 예언처럼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은 통신시장 전체를, 아니 IT업계 전체를 뒤집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스마트폰이 IT업계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인터넷 검색 능력부터 카메라, 통화품질까지 모든 부문에서 피처폰을 압도한 스마트폰은 과거 피처폰이 무선호출기의 몰락을 가져온 것처럼 전 세계 모바일 시장을 잠식해갔다. 

특히 스마트폰 업계의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애플의 아이폰4S와 삼성전자의 갤럭시s 시리즈가 출시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피처폰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글로벌 산업 분석기관 IDC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스마트폰 시장은 전년 동기 대비 11.3% 성장했으나, 피처폰은 전년 동기 대비 4% 감소했다. 

이후 2016년 아이폰7S, 갤럭시S7 등 굵직한 스마트폰 모델들이 대거 출시되고, 애플리케이션(App)의 이용이 대중화되면서 사실상 피처폰은 스마트폰에게 완전히 모바일 시장을 내주게 됐다.

스마트폰은 피처폰뿐만 아니라 MP3 플레이어, PMP, 디지털 카메라 등 수많은 IT기기의 몰락을 가져왔다. 스마트폰 하나만 구매하면 해당 기기들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픽사베이

◇ “휴대폰 넘어 카메라까지”… 스마트폰, IT업계의 ‘대멸종’을 부르다

‘스마트폰 군단’의 통신 시장 습격은 피처폰의 몰락만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단순 휴대폰으로써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이 종합된 ‘와해성 기술(업계를 완전히 재편성하고 시장 대부분을 점유하게 될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 PMP 등 수많은 IT기기들이 스마트폰의 등장에 휩쓸려 몰락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음악과 동영상을 각각 재생해줄 수 있는 것이 주 기능인 제품이 MP3 플레이어와 PMP인데, 스마트폰은 이들보다 뛰어난 화질과 음질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휴대전화로써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을 하나 장만하면 해당 제품을 살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아울러 디지털 카메라 역시 스마트폰의 등장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말았다. 앞서 언급한 MP3 플레이어나 PMP처럼 완전한 몰락이 이뤄진 것은 아니나, 전문가 수준의 카메라가 필요 없었던 일반인들에겐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도 충분한 초고화질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 카메라 시장도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스마트폰에 디지털 카메라 시장이 축소되면서 국내외 디지털 카메라 제조 업체들도 사업을 철수하게 됐다. 지난해 6월 일본의 올림푸스는 디지털 카메라 생산을 담당했던 영상 사업부를 매각했다. 사실상 84년만에 카메라 사업을 철수한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현재 세계 스마트폰 트랜드를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가 시장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2017년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접게 된 이유도 바로 스마트폰 때문이다.

무선호출기는 과거 피처폰에 의해 몰락했었으나, 현재 진동벨(사진 좌측)의 모습으로 바꿔 살아남고 있다. 마치 공룡의 몇몇 종이 새로 진화하면서 멸종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사진=리텍 홈페이지 캡처, 픽사베이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바꿔 아직까지 살아남아 현역으로 뛰고 있는 기술들이 있다. 바로 가장 먼저 소개했던 ‘무선호출기’다. 우리가 카페나 패스트푸드점 등 식당을 갔을 때 결제 후 건네받는 바로 그 둥근 ‘진동벨’이 삐삐의 진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진동벨은 과거 국내 무선호출기 제조사였던 ‘리텍’에서 발명한 제품이다. 무선호출기에 이용됐던 단거리 통신 기술을 이용해 매장 알림용 진동벨을 제작했고, 이는 국내 진동벨 시장 점유율 90%를 차지할 만큼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잘나갔던 기술들도 언젠가 새로운 대체 기술이 등장하면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인간 역사에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공룡의 후손이 대멸종의 시대에서도 ‘새’로 진화해 살아남았던 것처럼, 현재 진동벨의 모습으로 살아남은 ‘삐삐’처럼 과거의 제품들이 현 스마트폰 시대에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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