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직장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직장갑질119. 출범 4년을 맞이했지만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설명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직장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직장갑질119. 출범 4년을 맞이했지만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설명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송대성 기자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사의 말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직장인들이 대다수였던 우리 사회. 상사의 말이 곧 법이고 이를 어기면 직장 내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부분을 깨트리고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사내 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관행’이라는 틀에 갇혀 권리를 잊은 채 숨죽이며 업무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직장인들이 사내에서 벌어지는 괴롭힘과 갑질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을 선도한 곳이 ‘직장갑질119’다. 

2017년 11월 정식 출범한 직장갑질119는 카카오톡 오픈채팅이나 이메일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에 고통받는 직장인들의 제보를 받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단체다. 최초 단체명으로 거론됐던 ‘누구에게나 노동조합이 필요해 운동본부’라는 이름처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직장인들을 위해 노동계에 있는 운동가들이 힘을 모았고 심도있는 논의 끝에 현재의 명칭과 모습을 갖추게 됐다. 

조직 내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소외당하는 직장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직장갑질을 뿌리 뽑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을 쉼 없이 달려온 직장갑질119. <시사위크>는 지난 20일 직장갑질119 오진호 집행위원장을 만나 직장 조직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그리고 불합리함을 겪는 직장인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들어봤다. 

4년 동안 10만 건이 넘는 제보를 받은 직장갑질119. 이들이 움직일수록 직장인들이 겪는 불합리함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4년 동안 10만 건이 넘는 제보를 받은 직장갑질119. 이들이 움직일수록 직장인들이 겪는 불합리함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 “4년 동안 10만 건 넘는 갑질·괴롭힘 제보”

직장갑질119의 탄생 배경에는 광화문 광장을 밝힌 촛불 집회가 녹아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민주주의를 위해 광화문 광장을 채웠던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고 광장의 민주주의를 직장의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고민했고 그것이 발전해 직장갑질119가 만들어지게 됐다.

직장갑질119가 출범한 지 4년이 지난 현재 조직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갑질과 괴롭힘을 꾸준하게 지적한 결과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가 만든 기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직장인들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지난달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32.9%에 달했다.

“4년 동안 받은 제보가 10만 건이 넘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10명 중 3명은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는 수준이다. 심지어 10명 중 1명은 괴롭힘 정도가 심한 수준이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신고해봤다는 응답은 5%에 불과하다. 신고했다가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이 우려되고 신고해봤자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여전하다. 아직은 불합리함을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데 망설이는 직장인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오 위원장은 신고의 가장 큰 걸림돌을 ‘두려움’으로 꼽았다. 괴롭힘과 갑질을 당하다 보면 스스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돼 괜히 신고했다가 더 악화될 것을 우려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다는 얘기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도 문제라는 설명이다. 오 위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신고하고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럽의 경우 중학교 때 단체교섭 등도 해본다는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분이 없다보니 직장인들이 신고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며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나 대응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신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문화가 존재하는 것도 신고를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다”라고 전했다. 

◇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소통의 창구… 익명의 순기능

직장갑질119를 통한 신고 절차는 매우 간단하다. 복잡한 서류를 준비하거나 신변을 노출하지 않아도 된다. 카카오톡 오픈채팅 혹은 이메일은 통해 누구나 괴롭힘을 신고할 수 있다. 직장갑질119는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신고 방식을 확장할 수도 있지만 직장갑질119는 익명 신고가 주는 순기능에 주목했다. 

오 위원장은 “단체 출범 당시 함께 논의 했던 법률가들도 함께 직장갑질119를 운영하면서 익명 채팅방이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오픈채팅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낮은 문턱이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심리적 상태가 두려움인데 익명 플랫폼이 이러한 것을 완화시켜 주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익명 공간에서 만난 사람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했다. 오 위원장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시는 분인데 회사에서 갑질과 모욕적인 말을 듣고 휴가 사용도 제한을 당한 분이 있었다. 사실 법이 보호해줄 수 없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마음에 걸렸었다”라며 “하지만 이분이 포기하지 않고 불합리함과 싸웠고 인권센터에서도 괴롭힘이라 인정을 받았다. 지난 7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본인의 경험을 얘기하시는 부분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이제는 이분과 함께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 2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직장갑질119는 이러한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방침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 2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직장갑질119는 이러한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방침이다. /사진=김경희 기자

◇ “법 울타리 밖 사람들, 노동부가 함께 움직여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존재하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존재한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가해자와 소속이 다른 하청·용역·위탁노동자 △노동성이 인정되지 않는 특수고용·프리랜서 등은 여전히 법의 테두리 밖에 방치된 상태다. 

오 위원장도 이러한 부분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지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와 위탁, 프리랜서 등이 약 1,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분들이 다 법에 의해 보호받기 위해서는 법을 바꾸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하면 보완할 수 있을 것이냐를 고민했을 때 고용노동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법이 시행됐을 때 노동부는 ‘사용자의 괴롭힘을 회사의 감사가 처리하게 한다’고 입장을 내놨었다. 사장이 괴롭힘을 행하면 어떻게 회사 감사가 이를 처리할 수 있냐고 계속 문제제기를 했고 그 결과 노동부가 ‘사용자의 괴롭힘에 대해서는 노동부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노동부가 지닌 힘이라 생각한다. 노동부는 사업자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그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프리랜서와 간접고용자의 괴롭힘에 대한 신고를 노동부가 직접 받고 사업주에 경고를 주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서서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직장갑질119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괴롭힘을 당했다면 사직서가 아니 대응을 먼저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직장갑질119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괴롭힘을 당했다면 사직서가 아니 대응을 먼저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 직장갑질119가 꿈꾸는 ‘온라인 노조’

직장갑질119는 직종관 관련 없이 직장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직종별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이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다. 

직종별로 모인다면 그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고 갑질을 겪는 사람의 경우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위원장은 “온라인 몸을 만든다는 건 법률상담 공간이기도 하지만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운영하고 있는 직종별 모임도 있다. 보육교사119 같은 경우는 현재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네이버 밴드에 모여있다. 서로를 위로하면서 보육계에서 일이 발생하면 함께 목소리를 전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모임이 모여 ‘온라인 노조’로 거듭나는 것이 목표다. 

“직종별 모임이 제대로 갖춰진다면 조금 더 발전된 형태도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온라인 노동조합 실험’이라고 한다. 미용사119, 콜센터119, 학원강사119 등도 고민해볼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은 수준이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전무한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모여 노동조합처럼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단체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오 위원장의 바람이다. 

노동자들의 스피커라는 직장갑질119. 오 위원장은 갑질과 괴롭힘으로 고통받고 있는 직장인들을 위해 당부의 말도 남겼다.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하나는 사직서는 제발 먼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상담 오는 사례 대부분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사직서는 회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권리 포기 각서나 다름없다. 사직서를 쓰고 나와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먼저 사직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상담받는 것이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다. 상담을 미리 받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직장갑질119가 아니어도 좋다. 빨리 상담받아서 자신을 지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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