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이 영화 ‘기적’(감독 이장훈)으로 관객과 만났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배우 박정민이 영화 ‘기적’(감독 이장훈)으로 관객과 만났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배우 박정민은 매 작품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줬다. 독립운동가부터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피아노 천재, 래퍼, 미스터리한 정비공, 성소수자까지. 어떤 까다롭고 도전적인 캐릭터를 만나도 기어코 제 몫을 해내며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았다.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기적’(감독 이장훈)에서는 조금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준다. ‘기적’은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에 간이역 하나 생기는 게 유일한 인생 목표인 준경(박정민 분)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한국 최초 민자역 양원역(경상북도 봉화군)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해 호평을 얻고 있다. 

극 중 박정민은 실패 속에서도 꿈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준경으로 분해 평범한 17세 소년의 얼굴을 그렸다. 준경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수학 천재이지만 현실에서는 ‘허당미’를 발산하는 인물. 기찻길만 있고 기차역은 없는 마을에 간이역을 세우고자 엉뚱하고도 기발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한다.

‘4차원 수학 천재’라는 설정이 있지만, 준경은 그동안 박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큰 특징은 없다. 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힘’은 결코 밀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소녀의 고백에 얼굴을 붉히고, 무뚝뚝한 아빠의 칭찬이 고프면서도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등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정서를 전달하며 관객을 울리고 웃긴다. 

박정민은 준경의 성장을 담담히 그려낸다. 극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물론,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을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연기로 담아내 몰입도를 높인다. ‘비범함’과 ‘현실 바보’ 사이를 오가는 유쾌한 매력부터 애틋한 가족애로 묵직한 울림을 안긴다. 능숙한 사투리 연기에서는 박정민 특유의 성실함이 묻어난다. 

박정민은 최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시사위크>와 만났다. 영화 ‘기적’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는 물론, 그동안 배우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데뷔 10주년을 맞은 소회를 전했다. 특히 데뷔작 ‘파수꾼’(2011)을 떠올리며 “처음 영화를 찍었을 때 가졌던 생동감과 순수함을 잃지 않고 연기하고 싶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기적’으로 또 한 번 진가를 증명한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적’으로 또 한 번 진가를 증명한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들 중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의 영화이고 캐릭터 역시 가장 평범했다.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최근 사건이 크고 캐릭터가 강한 역할들을 많이 하게 됐는데, 그런 캐릭터들이 좋아서 일부러 택한 건 아니었다. 재밌는 시나리오에 참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기적’도 시나리오에 끌려서 이야기가 재밌어서 참여하게 됐다.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나 역시 장르물을 좋아하고 장르물에 빠져있는 관객 중 한 명인데, 가끔씩 ‘기적’ 같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선택하기에 정말 좋은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준경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주는 매력도 있었다. ‘다만악’ 유이나 ‘사바하’ 나한 같은 역할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접근 방식이 달랐던 건 아니다. 시나리오에 충실해서 연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 그렇게 임했다.”

-준경이 그동안 선보였던 캐릭터들과 스타일이 달라 비워내고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을 것 같은데.
“물론 있었다. 촬영 초반에 감독님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가긴 했다. 감독님이 ‘흰쌀밥 같은 연기, 어떤 배우와 만나도 잘 어우러지는 연기를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초반에는 쉽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고 해보고 싶은 거다. ‘내가 연기를 못하나’ ‘덜했나’ ‘이제 내가 재능이 없다는 것이 까발려지는 건가’ 여러 생각이 들었다. 허전함도 느꼈다. 그래서 감독님을 찾아가 긴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까지 촬영한 신들을 본 결과 지금처럼 본인을 믿고 가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함께 만든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니 초반 힘들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현장이 점점 더 좋아졌다.”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준경의 모습이 끊임없이 도전하는 배우 박정민과 닮아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준경의 이런 감정들에 어떻게 공감을 했는지, 실제 본인과 닮았다고 느낀 지점도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들이 도전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택하고 영화에 참여할 때는 그렇게 큰 생각을 하지 않고 한다. 그냥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한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선택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생스러운 캐릭터들을 하긴 했다.(웃음) 내게는 모든 작품이, 영화 한 편 한 편이 항상 도전이다. 

내가 열아홉이었을 때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자꾸 떨어졌다. 그러고 나면 주변에선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었다. 당시 내게 영화배우라는 꿈과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주변에서 봤을 때 굉장히 터무니없는 거였다. ‘네가 어떻게’라는 반응이었다. 열이면 열 다 그랬다. 혼자 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쉽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잘못된 미로로 계속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엔 막다른 길로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준경의 마음에 대입이 됐던 것 같다. 꿈이 좌절됐을 때 혹은 꿈을 이뤘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했을 때, 내 몸에 남아있는 감정을 끄집어내는 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기적’에서 수학천재 17세 소년 준경을 연기한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적’에서 수학천재 17세 소년 준경을 연기한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나이 설정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17세 소년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내가 느낀 부담감보다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감독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믿고 갔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살 빼는 것밖에 없었고, 의상이나 분장, 준경을 둘러싸고 인물들 등을 제작진이 잘 세팅해 주셔서 무리 없이 고등학생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장훈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시나리오적인 대안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좋아서 이 작품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시나리오는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준경의 반 친구들을 고등학생이 아니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친구들로 구성해서 위화감이 없게 만든다든지, 조금 더 컬러감이 있는 옷을 입으면서 조금 더 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든지 상의를 했다. 또 현대사회가 될수록 외적인 모습이 연령보다 더 어려진다고 생각했다. 2021년에 개봉하는 영화이지만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그때의 10대와 지금의 10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평소 안 쓰던 사투리에다가 감정도 넣어 연기해야 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매우 어려웠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사투리였는데, 경상도와 강원도 사투리가 섞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을 만나고 처음 들어봤다. 연습이 많이 필요했는데, 어느 순간 어떻게 하면 사투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혈안이 돼있더라. 자칫하면 위험하겠다 싶었다. 감정이 드러나는 장면도 많은데 사투리에 내가 너무 갇혀있으면 대사를 하면서 나 자신을 자꾸 검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그래서 사투리는 관객들이 듣기에 너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자 마음을 먹었다. 영화에 대한 분석과 캐릭터의 감정, 정서를 더 파악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적절하게 분배하는 과정이 있었다. 도와주는 분들도 있어서 다행히 잘 마칠 수 있었다.” 

박정민이 첫 영화를 찍을 때 느꼈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박정민이 첫 영화를 찍을 때 느꼈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실제 양원역에 방문하기도 했다고. 느낌이 어땠고, 세트로 완성된 양원역을 본 소감도 궁금하다. 
“마을이 산골짜기에 있어서 역으로 가는 길이 휴대폰도 안 터지고 그렇더라. 그 옛날 찻길도 없고 걸어서 몇 시간을 역으로 왔다 갔다 했다는 걸 생각하니 끔찍하더라. 사고도 많이 났다고 하더라. 그래서 준경의 노력에 더 공감이 갔다. 그런데 실제 양원역보다 세트로 만든 양원역에 훨씬 더 이입이 됐다. 물론 실제로 다 한 것은 아니지만, 부지를 삽질해서 다듬고 벽돌을 쌓고 간판을 달고 중간중간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촬영했다. 그러다 보니 양원역이라는 건물이 마치 어떤 자아가 있는 하나의 개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 만들어지고 기차가 서지 않고 지나갔을 때 양원역을 보면서 뭉클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도 울컥하더라. 양원역 앞에서 누나와 싸우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도 양원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둘이 아니라 셋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나와 준경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사진 한 장 못 찍은 게 너무 아쉽다. 애착이 가는 곳이었다.”

-준경에게 누나는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잊고 싶지 않은 존재이자 기억이었다. 박정민에게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나 순간, 기억이 있을까.  
“있다. 잊어서는 안 되고 잊고 싶지 않다. 나의 처음 태도에 관한 것 같다. ‘파수꾼’을 찍을 때 나의 모습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었고, 그 영화가 잘 돼고 내가 데뷔하게 되고 그런 건 상상도 못했다. 장편영화를 찍는다는 것, 내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즐거웠고 함께 영화를 만드는 현장과 사람들이 다 좋았다. 그때 기억이 정말 좋다. 1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많은 현장을 겪고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느낌이다. 그것도 어쭙잖게. 영화를 처음 찍었을 때 갖고 있던 생동감이라고 해야 할까 순수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더 겸손해지고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하는데 사실 쉽지 않다. 그때 그 마음가짐을 앞으로 연기하는 동안 잊고 싶지 않다.” 

-앞서 배우를 꿈꿨던 때 떠올리며 ‘잘못된 미로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또 불안함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은 언제였나.  
“그때마다 은인들이 나타났던 것 같다. 그분들이 나를 잘 지도해 주고, 이끌어줘서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나 혼자서는 쉽지 않았을 거다. 우연치 않게 은인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셔서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확신’은 지금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서워서다. 언제나 조심하자는 생각이다. 작은 긴장이라도 하고 지내려고 한다. 아직까지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 잘 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은 없다.”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박정민. /롯데엔터테인먼트​

-겸손한 답이다.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고, 많은 이들이 찾는 배우이지 않나.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정말 모르겠다. 진짜. 그냥 제 몫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봐주는 게 아닐까 생각은 든다. 현장에서 크게 말썽 부리지 않고 묵묵하게 제 몫을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역할을 저 친구에게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아직 나는 정말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많이 찾아주시는 현상이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다.”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았다. 스스로에게 박한 편이라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그동안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떤 감회가 드나.
“하하. 맞다. 그래도 좋은 이야기를 해보자면 배우가 되고 싶었던 순간에 가졌던 신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마음가짐을 쉽게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점이 그나마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칭찬인 것 같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쉬운 길로 가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고민을 할 때마다 존경하는 선배와 감독님들을 생각하면서 버텼다.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길, 가고 있는 길을 잘 따라가는 후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항상 임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나 자신을 배신하고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을 똑바로 따라가다 보면 또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흘러가려고 한다.” 

-코로나19 시국 속 추석 극장가에 걸리게 됐다. 이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 같고, 극장에서 보기에 잔잔하고 소박한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추석 개봉인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잔잔한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나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이 영화가 그저 잔잔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안의 정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물론 화려한 카메라 무빙이나 눈에 띄는 캐릭터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보고 있으면 그 정서가 주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가족들과 함께 보면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을 영화가 대신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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