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봄은 평양에도 생기를 돌게 한다. 대동강 산책로인 유보도에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낚시꾼들도 모여든다. 보통강변 버드나무는 푸른빛을 더해간다. 평양의 옛 지명이자 별칭이 ‘버드나무 도시‘라는 뜻을 지닌 유경(柳京)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유난히 고단했던 지난 겨울의 때벗이를 한 주민들은 모처럼 웃음 지을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기다. 코로나19에 대북제재, 경제난까지 겹친 팍팍한 삶이지만 봄은 그래도 희망이다.

물론 주민들이 마음 놓고 이런 봄날의 일상을 누리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많다.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미사일 도발과 핵 카드를 쥐고 흔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있다. 그는 연초부터 탄도미사일 도발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지난 1월 한 달에만 7차례 미사일을 쏘아 올렸는데, 이런 집중적인 도발은 북한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공세적 행보는 거침없었고 마침내 3월 2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을 발사했다면서 ’성공‘을 자축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듯한 북한 조선중앙TV의 미사일 발사 관련 영상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선글라스와 검은색 가죽점퍼 차림의 김정은 위원장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북한군이 일제히 ’발사‘를 외치는 장면 등에서 뭔가 기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다. 

문제는 앞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다. 그는 미사일 발사 직후 ”강력한 공격수단들을 더 많이 개발해 우리 군대에 장비(배치)시키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 ”누구도 멈춰 세울 수 없는 가공할 공격력,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춰야 전쟁을 방지하고 국가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크게 우려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찰용 위성개발’이라고 연막을 피우며 위성사진 몇 장을 공개하던 북한은 태도를 바꿔 ICBM 발사를 선언하고 공격수단 운운하는 태도를 보였다. ‘평화적 핵 동력 공업’이란 말로 국제사회를 기만하며 비밀리에 핵 개발을 하던 시절의 행태를 미사일 프로그램 완성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유엔과 서방세계는 김정은 체제 북한의 이런 뻔뻔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적 행동은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완전한 파산을 불가피하게 한다.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로 한반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상황보다 더 심각한 국면을 맞았다는 점에서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 화해 분위기, 그리고 판문점과 평양에서 3차례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남북한은 봄날을 꿈꿀 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은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 같은 상황까지 연출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주도한 ICBM 도발은 이런 모든 것이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2020년 6월 개성공단 내 남측 시설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북한이 폭파했을 때 남북관계는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것이란 진단이 나왔다. 앞서 북한은 2018년 4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서 핵과 미사일의 모라토리엄(핵 실험 및 시험발사 유예)을 선언했지만 이번에 뒤집었다. 서방기자까지 초청해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 폭파 쇼를 벌였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굴착으로 복원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북한의 도발로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을 주도한 핵심 인사들도 발을 빼는 분위기다. 정의용 외교부장관은 3월 28일 국회 답변에서 ICBM을 발사한 북한을 ‘적(敵)’이라고 규정했다. 꼭 4년 전 정의용 장관은 청와대 안보실장 자격으로 북한을 특사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정의용 장관은 당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며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미 정상회담 의사를 전한 바 있다. ”대북정책의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정 장관의 군색한 국회 답변은 임기 막판 남북관계 파국을 확인하고 짐을 싸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고민을 드러낸다.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는 윤석열 당선인의 입장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빈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남의 그림이나 글을 덧칠 또는 수정‧보완해 완성해야 하는 경우다. 헝클어진 남북관계와 위기의 한반도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의 소통 창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한미동맹 강화나 대북 제재망 확장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를 막아내기에는 사실상 어려움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중국과 러시아의 대미 공조전선이 형성되면서 미국 주도의 유엔 대북제재 추진 방안은 번번이 양국의 거부권 행사에 막혀 버렸다.

북한 도발의 D-데이로 거론되는 4월 15일 김일성 110회 생일은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대규모 열병식과 핵 실험, 미사일 추가 도발이 이어지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강경 대외 메시지는 더욱 수위가 높아질 것이다. 미국 등 서방의 대북압박 또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시위를 배합하는 쪽으로 전개된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를 가진 ICBM 시험발사를 강행한 북한을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분위기가 워싱턴 정가에는 차고 넘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생각과 결심이 중대국면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관심 갖고 챙겨야 할일은 북한 주민의 굶주림과 최소한의 인권보장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꼭 10년 전인 2012년 4월 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 섰다. 마침 100회 생일을 맞은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 국가주석 축하행사에서 첫 공개연설을 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절대 권력을 넘겨받은 지 5개월 만에 단상에 선 28살 청년지도자를 보는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적지 않은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서 조기유학을 한 젊은 지도자는 선대와 뭔가 다를 것이란 측면에서다. 개혁‧개방에 대한 설렘도 있었다고 당시 평양에서 지냈던 탈북민들은 귀띔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김일성광장 연설을 통해 ”다시는 우리 인민들에게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던 김정은 위원장의 약속은 없던 일이 됐다. 아예 공공연하게 ”허리띠를 다시 조이고서라도…“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정도다. 주민들에게 차려진 건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로 더욱 궁핍해진 일상과 민생이다.

”화성포 미사일 발사 성공“이란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에 환호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김정은 위원장은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아무리 전체주의 독재체제 방식으로 철저히 통제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외부세계에 눈뜬 엘리트와 억압적 통치에 의구심을 갖는 북한판 MZ세대들을 주축으로 북한이란 둑에는 작은 물구멍이 생겨나고 있다. 10년 전의 약속을 저버린 지도자에 대한 민심이반은 핵과 미사일로도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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