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 정민의 저서 『조심』을 읽다가 사자성어 치모랍언(梔貌蠟言)을 알게 되었네. 그럴듯하게 꾸며 세상을 속이는 일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지. 중국 당나라의 문관이며 시인이었던 유종원의 「편고」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군. 편고(鞭賈)는 채찍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먼저 그 이야기부터 들어보세.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한 부자가 시장에서 50전이면 살 수 있는 말채찍을 5만 전에 샀다네. 겉만 번지르르한 채찍을 보고 장사꾼의 감언이설에 속은 거지. 친구가 속은 거라고 말해도 믿지 않던 그 부자는 어느 날 길거리 맞은편에서 오던 수레와 다투게 되네. 화가 난 부자가 채찍을 들어 상대편 말을 후려쳤지만, 엉겨 붙었던 말은 전혀 꼼짝하지 않고 채찍만 대여섯 조각으로 동강 나 땅에 떨어지고 말지. 황금빛으로 빛나던 채찍의 안쪽은 텅 비어 있었고, 결은 썩은 흙 같았네. 황금빛은 치자 물을 들인 거였고, 광택은 밀랍 칠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거지. 그런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3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장사꾼을 잡을 수도 없는 걸.

왜 뜬금없이 어렵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사자성어 이야기냐고? 요즘 우리 대통령 정치하는 걸 보면서 저 부자처럼 뒤늦게 속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야. 취임한 지 이제 막 두 달이 지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했네. 지난 8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과 부정 평가가 각각 37%와 49%로 부정이 긍정보다 12%포인트 더 높았어. 11일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들은 더 심각하네. 리얼미터 조사는 긍정과 부정이 각각 37%, 57%로 그 차이가 20%포인트였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는 긍정평가가 34.5%, 부정평가가 60.8%로 그 격차가 무려 26.3%포인트야. 올해 3월 9일에 있었던 대선에서 얻었던 윤 대통령의 득표율 48.6%와 비교해 보면, 4개월 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윤 대통령의 정치 형태에 실망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걸세. 치모랍언이라는 사자성어를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럼 뭐가 정치적 중도층을 넘어 국민의힘 지지자들인 보수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을까? 여론조사에서는 인사 참사, 경제·민생 소홀, 경험·자질 부족, 무능 등을 부정 평가 요인으로 자주 언급하고 있네. 맞는 지적이야. 거기에 더해 윤 대통령이 국민들을 대하는 자세도 문제가 많아. 지금처럼 여소야대 국면에서 국민들의 지지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지지율은 별로 의미가 없다”거나 “전 정권에서 지명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냐”면서 국민을 무시하거나 국민에게 대드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직도 대통령과 검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윤 대통령에게 아주 짧고 쉬운 시 하나 들려주고 싶네. 김용택 시인의 <이순>일세.

“내 나이/ 올해로 이순耳順, 세상물정 모르는 바 아니나,/ 시 몇 편 써놓고/ 밖에 나가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너희들은,/ 내가 이렇게 잠시나마/ 끝없이 너그러워지는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내 나이/ 이순, 살아온 날들을 지우라는 뜻이다.”

윤 대통령도 1960년에 태어났으니 진작 이순을 넘긴 나이지. 공자는『논어』<위정편>에서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되는 예순 살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생각하는 게 원만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걸 순리대로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뜻이야. 예순이 된 시인은 ‘시 몇 편 써놓고’ 나니 부러울 게 없고, 마음이 끝없이 너그러워졌다고 말하고 있네. 하지만 60년 이상 살았다고 누구나 다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예순 살이 넘어서도 ‘귀가 사나워지고 덩달아 목소리도 갈라지’는 노인들도 많아. 왜 그럴까? 지나온 날들을 지우지 못해 마음이 죽어버렸기 때문이야. 마음이 죽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고집만 세져. 그래서 비루하고 추해 보이지.

장자는 「제물론」에서 “큰 앎은 너그럽고 여유롭고(大知閑閑), 작은 앎은 사소하게 따지기 좋아한다(小知間間). 큰 말은 힘차고 아름답지만(大言炎炎), 작은 말은 공연히 수다스럽다(小言詹詹)”고 말했네. 지금 우리 대통령은 검사 생활하면서 몸에 밴 작은 앎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상만사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래서 큰 말 대신 작은 말만 하고 있지. 검찰은 국가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조직이야. 주로 범죄자들을 상대하던 검사 시절의 사고와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국민 여론을 무시하다가는 머지않아 치모랍언의 고사에서처럼 대여섯 조각으로 동강난 채찍 신세가 되고 만다는 걸 왜 모를까. 표를 모아주었던 노인들 부끄럽지 않게 하루 빨리 나만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길 바랄뿐이네. 겸손은 약자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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