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매일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시각에 일어나 만 보를 걷기 시작한 지 벌써 10개월이 되었네. 생전 규칙적인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고희(古稀)를 2년 앞두고 나와의 괴로운 싸움을 시작한 건 몸무게가 계속 늘고 혈압이 올라가서야. 이러다가 쓰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나더군. 그래서 술과 담배를 끊던 때처럼 독한 마음먹고 하루에 만 보 이상 걷기 시작했던 거야. 그것도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고 말했던 그 아침 시간에.

그렇게 꾸준히 걸은 결과가 궁금하지? 일단 대성공이야. 걷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게 신기해. 300일 만에 약 7kg을 뺏어. 아직 ‘정상 체중’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나를 잘 아는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살 많이 빠졌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기분이 좋아.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자주 잔소리를 들던 불쑥 나온 똥배가 사라진 게 매우 신기해. 며칠 전에 만난 옛 제자들은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걱정하더군. 꽤 날씬한(?) 노인으로 변한 모습을 자네에게도 보여주고 싶구먼.

동이 트기 전에 1km 정도 떨어진 동네 공원에 가서 걷는 게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매우 좋다는 걸 날마다 걸으면서 알게 되었네. 먼저, 새벽에 동네 골목과 공원에 나와 운동하는 노인들과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아.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냥 지나쳤지만 자주 만나니 자연스럽게 서로 아는 척을 하게 되더군. 그래서 지금은 새벽과 아침 시간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동네 노인이 10명을 훌쩍 넘었어. 40년 이상 한 동네에서 살면서도 데면데면했던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걷는 상쾌한 아침, 행복한 하루의 시작일세.

어슴푸레한 박명(薄明, twilight)의 새벽하늘과 새벽빛을 보면서 걷다 보면 일찍 잠에서 깬 만물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시간을 갖게 되네. 내가 걷는 공원은 깊은 숲은 아니지만 관악산 기슭에 있어서 풀과 나무, 이름 모르는 새들이 많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생명력이 넘치는 공원이지. 내 발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식물들과 새들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도 그들의 숨결에 맞춰 흡! 흡! 흡! 숨을 내쉬면서 더 힘차게 걷기 시작해. 그들이 노래하기 시작하면 나는 걸으면서 춤을 춰. 그러다가 내가 먼저 ‘안녕~’하고 인사하면 그들도 내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듯 방긋 웃으면서 ‘안녕~’하고 응답하는 소리가 들려. 그들과 나의 감응(感應)이 시작된 거지. 나만 그들이 반가운 게 아니라 그들도 날마다 보는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이심전심으로 느끼게 돼.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내가 ‘지각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가 되는 거지. 그래서 내게 아침은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해. 맹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혜시(惠施)가 말했던 범애만물천지일체(凡愛萬物天地一体), 천지가 일체이니 만물을 동등하게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상 만물이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행복한 시간이야.

오늘 아침에는 여름이라 매미들이 흥겹게 노래하고 있더군.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타고 퍼져나가는 매미들 노랫가락에 맞춰 걷다가 갑자기 내 몸이 가푼해져 하늘로 떠오르는 환희의 순간을 맛보았네. 새벽 공기와 새벽빛, 만물이 내뿜는 숨결과 매미의 흥겨운 노랫소리에 취해 나도 모르게 춤을 추고 있더군. 발로 듣고 귀로 걷는 황홀한 순간이었어. 그러니 19세기 말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시인이었던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시 <인생은 아름다워>가 절로 나올 수밖에.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 귀가 들린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 인생은 아름다워

그렇네. 인생은 아름답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몸마저 움직일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섭고 황당할까. 날마다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걷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인지 건강할 때는 몰라. 하지만 자네와 나 같은 노인들에게는 두 발로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 더 열심히 걸을 수밖에. 몸이 걸으면, 마음도 걷고 영혼도 함께 걷는다는 걸 잊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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