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이대학 사회학 박사)
“통진당 해산청구 됐다고요? 사필귀정에 만사지탄이고요 이번에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채증사진 등 관련증거를 법무부를 시켜 헌재에 제출하겠습니다. 그걸 보고 피가 끓지 않으면 대한민국 국민 아닐 걸요.”

섬뜩하지? 누구의 글인지 아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 방문을 수행했던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라네.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이 국민들을 상대로 협박을 하고 있는 꼴이네. 파리에서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집회를 연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을 상대로 보복을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군.

우리가 대학을 다녔던 군사독재 시절이 생각나는구먼. 당시에도 권력을 가진 자들은 폭력적인 언어로 국민들을 지배하고 편을 갈랐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전라도 사람’임을 밝혀내서 배제하는 세상이 다시 왔구먼.

저 글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의 최고 학부에서 법을 공부한 검사 출신이라는데, 그가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알까? 그런 대학에 들어가려면 공부도 잘 했을 텐데, 내가 보기엔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 같네. 그러니 자신의 저런 행동이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가치들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걸 모르지. 역설적이게도 그의 글을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이나 법치주의가 왜 필요한지 알겠구먼. 물론 자신은 법 위에 군림한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권력자들에게는 그런 제도나 가치들이 거추장스러운 짐이지.

그래서 독재자들은 의회나 사법부를 시녀로 만들려고 무리를 하다가 탈이 나기도 하지. 아무튼 저 글을 쓴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 주요 가치들은 뭘 지 궁금하구먼. 저 글을 쓴 분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시위와 집회의 자유 등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건데……. 왜냐고? 대한민국은 그런 자유민주적 가치를 보장하는 나라이니까. 내가 바보인지 그가 바보인지 모르겠군.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 존엄성, 사생활을 존중하고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다른 이름이나 다름없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이 사회나 국가보다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믿지. 그래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경우에만 제한된다는 ‘위해법칙(harm principle)을 주장한다네.

서양에서 16~18세기에 걸쳐 형성된 자유주의는 근대사회 발전의 주역이었던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반영했던 이념이었기 때문에 자연권 사상에 기초한 생명, 사유재산권, 입헌주의, 법치주의, 최소국가 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 게다가 자유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은 인식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삼권분립이나 법치주의 등을 통해 권력을 통제하고, 상호 비판의 자유나 관용을 통해 다양한 가치들이 공론의 장에서 토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네.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나를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난 1987년 이후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절차적 측면에서는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줄 알았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아시아에서는 일본이나 인도보다도 자유민주주의를 잘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고 종종 강조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이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네.

하지만 그런 내가 무척 순진한 사람이란 걸 지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알았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5·16과 유신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때 저게 진심일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난 믿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여자들의 말을 잘 믿는 사람 아닌가. 여자들은 거짓말이나 부정 같은 건 하지 못할 만큼 착하다고만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지. 그런데 여자가 남자보다 더 독하고 무섭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네.

유신헌법 제정과 전파에 공헌하고 ‘우리가 남이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조장했던 사람을 비서실장에 발탁하고, ‘제2의 새마을운동’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할 때에야 속았다는 걸 알겠더군.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투철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게 아니더군. 주군이 그러니 소인배들이 날뛸 수밖에. ‘차라리 유신 때가 더 좋았다’, ‘5·16 쿠데타는 구국의 결단이다’, ‘한국에서는 독재를 해야 한다’ 등 세상이 다시 1970년대로 돌아간 것만 같네. 우리가 땀과 피를 흘리며 쌓아올린 민주주의란 탑이 독재자의 딸에 의해 와르르 무너질 사상누각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 범정부적으로 이루어진 대선 개입, 전교조의 법외 노조화, 전공노사무실 압수수색,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 등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가 젊은 시절에 자주 봤던 공작정치의 냄새가 나서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 두렵고 무섭다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썼던 자유주의자 칼 포퍼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했던 서양의 철학자들, 즉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을 열린사회의 적으로 비판하지. 지금 이 땅에서 열린사회의 적들은 누구일까?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 해산 심판을 청구하는 걸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서 헌법질서와 자유민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이 누군 인지 헷갈리더군. 자유주의의 주요 가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자신들이 자유민주적 질서를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열린사회의 적인 아닐까?

그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세습 왕조나 다름없는 북한과 뭐가 다를까? 다가오는 겨울이 예년보다 더 길고 추울 것만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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