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多死多亂)’
올 한 해 재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더불어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전방위적 압박으로 인해 주요 기업들은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특히 재벌그룹들은 어느 해 보다 우울한 한해가 됐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군기잡기’로 굴지의 대기업들이 상당수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다. 유명한 그룹 총수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게 됐고, 상당수 대기업들은 사정 칼바람으로 인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초동으로 향하는 총수들의 모습이 신문지면과 방송화면을 채웠고, ‘압수수색’이란 단어 역시 익숙해질 정도로 빈번하게 소식을 전했다. 이 때문에 재계, 특히 재벌가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 아니라, ‘다사다난(多死多亂)’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올해 유난히도 혹독한 한해를 보낸 재벌가의 수난사를 들춰봤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시시위크= 이미정 기자]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사회적 책임, 꿈과 비전으로 연결된 가족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오리온그룹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동양그룹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지난 9월 23일 손윗동서인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면서 임직원들에게 남긴 말이다.

◇ 무너진 '신뢰'

현 회장과 담 회장은 각각 고(故)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의 두 딸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과 이화경 오리온 부회장을 배우자로 둔 동서지간으로, ‘사위경영’ 시대의 포문을 연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모인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고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 부인)까지 나서 사위인 담 회장와 딸에게 오리온 지분을 담보로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담 회장 부부는 끝내 지원 요청을 뿌리쳤다. 이는 지원에 나섰다가 자칫 잘못될 경우 경영권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지막 희망까지 없어진 동양그룹은 결국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현재는 공중분해 단계를 밟고 있다. 현 회장은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 혐의 등으로 구속 위기에 놓여있다.

그런데 ‘형제의 정을 져버렸다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지원을 거절한 담 회장도 마냥 속 편한 한해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담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추락한 신뢰성을 회복하지 못한데다, 지난해부터 각종 구설에 휘말렸다.

담 회장은 2001년 동양그룹에서 독립한 오리온그룹을 급성장시킨 주역이지만, 지난 2011년 수백억원대의 횡령 및 배임 혐의가 드러나면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담 회장은 해외 유명작가 고가미술품 10점을 계열사 법인자금으로 매입해 성북동 자택에 설치하는 수법으로 회삿돈 140억원을 빼돌리고 법인자금으로 고급승용차 리스, 사택 신축 및 관리 등에 지급하게 해 모두 285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2011년 6월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담 회장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지난해 1월 석방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담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바 있다.

◇ 끝나지 않는 비자금 악몽

하지만 담 회장은 또 다른 ‘비자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오리온그룹이 최대주주로 있는 스포츠토토에서 비자금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은 담 회장의 횡령을 도운 혐의로 재판에 넘겼던 조경민 전 오리온그룹 사장이었다.

조 전 사장은 임직원 급여를 실제보다 많이 지급한 것처럼 꾸며 차액을 횡령하고, 스포츠토토 투표용지 발주물량을 부풀리는 수법 등으로 100억원대 배임·횡령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다.

핵심 측근의 비리로 담 회장은 다시금 검찰의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다. 조 전 사장이 조성한 비자금이 담 회장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후 업계의 예상과 달리 수사는 담 회장 일가까지 확대되지 않았지만, ‘스포츠토토 비자금 사건’으로 오리온그룹은 운영 자격을 의심받는 등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담 회장은 과거 전력으로 끊임없이 구설에 올랐다. 올해 초 검찰은 담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을 미술품 거래 등의 명목으로 은닉해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의 탈세 의혹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홍 대표가 다시 검찰 수사망에 오르면서 담 회장의 비자금 조성 전력도 또 주목을 받았다.

◇ 등기이사 사퇴 논란

이후에도 구설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11월엔 등기이사 사퇴하는 과정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담 회장과 부인 이화경 부회장은 지난 11월 14일 등기이사에서 전격 물러났다.

‘전문 경영 체제’를 강화하고  해외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업계의 생각은 달랐다. ‘연봉공개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뒷말부터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일었다.

내년부터는 상장사 등기이사 보수가 연 5억원 이상인 경우 근로소득·퇴직소득 등 구체적인 항목별로 개별 공시해야 한다. 업계에선 이미 한 차례 고액 연봉 논란에 휘말렸던 담 회장이 이를 부담스러워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선 담 회장은 지난해 매달 5억1,761만원의 급여를 지급받은 사실이 드러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이와함께 최근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대기업 오너 일가에 사회적 책임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담 회장이 계속 구설에 끊임없이 휘말리는 이유는 ‘무너진 신뢰’를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 크다. 그런데 문제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때, 정작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등기이사 사퇴를 결정한 담 회장에 더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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