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가 한국 정부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대통령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서예진 기자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한국 정부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대통령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서예진 기자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한국 정부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정치권도 들끓고 있다. 해당 의혹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용산 졸속 이전’을 다시 꺼내들며 대통령실 청사의 보안이 허술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근 외교안보라인 교체가 이와 관련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미국 뿐 아니라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지 관심이 쏠린다.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량 유출된 미 국방부 기밀문서 속에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 등 대통령실의 외교참모 간 민감한 대화 내용이 담겼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원칙을 바꾼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NYT에 따르면, 문서에는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포탄 지원과 관련해) 분명한 입장 없이 한·미 간 정상통화는 곤란하다”며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김 전 실장이 한·미 정상회담 성사와 무기 지원 약속을 거래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며 우려하는 내용이 담겼다.

◇ 대통령실 “필요할 경우 합당한 조치 요청”

문제는 이같은 대화 내용이 도청을 통해 수집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NYT는 “비밀보고서는 신호 정보를 기반으로 했으며, 이는 미국이 아시아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를 염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즉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2주 앞둔 상황에서 한미동맹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악재가 불거진 셈이다. 

미국의 동맹국 도청 의혹이 불거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이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를 10년 넘게 도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2021년에도 NSA가 2012~2014년에 유럽 고위 정·관계 인사들을 도청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바 있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면 박정희 정부 시절 CIA가 청와대를 감청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 때문에 NYT는 미국의 도청 정황이 드러난 것에 대해 “동맹국들에게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한국을 포함한 주요 동맹 국가와의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이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없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이스라엘과 프랑스 등은 문건 속 도청 내용이 ‘허위 정보’라고 전면 부인했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도 10일 기자들과 만나 “미국에선 유출 자료 일부가 수정되거나 조작될 가능성이 제기된다”며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등의 대응을 살펴달라고 했다. 

또 대통령실은 도청 의혹과 관련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는 “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실 관계 파악이 가장 우선이다. 또 유출 자료 일부가 수정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했다. 이어 “양국 상황파악이 끝나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 미국 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다. 이런 과정은 한미동맹간 형성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이번 사태의 사실관계를 파악한 후 미국 측과 협의를 한다는 것이다. 

◇ 보안 취약 지적에 “청와대보다 용산이 더 안전”

그러나 대통령실의 이같은 태도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양국 신뢰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주권 침해이자 외교 반칙”이라며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대응은커녕 한미 신뢰는 굳건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겠다, 타국 사례를 검토해 대응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만 한다”고 비판했다. 

또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동맹국 사이에 도청, 감청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며 “엄중한 상황임에도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며 과거 전례와 다른 나라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보겠다’고 반응했다니 한심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 항의해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협의를 한다는 말인가”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용산 대통령실 이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해 5월에 있었던 이종섭 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김병기 민주당 의원이 '대통령실 이전 시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 있다'면서 대비를 요구했다. 국민의힘 소속인 신원식 의원 역시도 비슷한 주문을 했다. 이 때문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 않고 대통령실을 옮기면서 도청 등 보안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성한 전 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해당 문건과 관련한 이유로 사퇴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날 YTN ‘뉴스큐’에서 “김 전 실장이 해임된 2~3일 후에 제이크 설리번하고 공연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다고 얘기를 했다. 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오히려 경질이 됐지 않았나, 그렇게 본다"고 주장했다.

물론 대통령실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했다. 또 대통령실 관계자는 청사 보안과 관련해 “대통령 청사 보안 문제는 이전할 때 완벽하게 준비했고,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아무 문제 없다”며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보안 안전은 청와대보다 용산이 더 탄탄하다”고 반박했다. 통상적인 보안 장치들을 포함해 그 이상의 시설이 가동되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오히려 대통령실은 이번 미국 CIA의 도감청 의혹과 관련한 야당의 지적을 ‘정치공세’로 보고 있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사실관계가 밝혀지더라도 명확한 항의 조치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관련 악재가 불거지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이다. 이 관계자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과장, 왜곡해서 동맹관계를 흔들려는 세력 있다면 많은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