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을미년 설날 아침이네. 작년 설날 이순(耳順)이 되면서 들려준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라는 시를 기억하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고,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죽고 난 후에 묘비에 새겨질 ‘참삶의 나이’가 결정된다는 시였네. 작년 한 해 동안,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에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날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될 수 있으면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애쓰고는 있네만… 그래서 다시 을미년  설을 맞으며 혼자 다짐하네. 지금 내 ‘참삶의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날은 없을 거라고. 남아 있는 시간 동안이나마 나보다는 남들을 먼저 배려하고 걱정하는 ‘생각하는 노인’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의 가장 큰 꿈은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걸세. 《장자》제1편의 제목이 ‘소요유(逍遙遊)’, 즉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장자는 여기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큰 새가 되어 구만리 창공을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게나. 황홀하지 않은가? 장자가 그의 책 맨 첫 장을 작은 알에서 물고기를 거쳐 새가 되어 자유롭게 창공을 나는 붕새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난 그가 우리 인간도 누구나 노력만 하면 스스로를 변화시켜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장자는 우리가 그런 절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해야 한다고 가르치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명예를 탐내지 않으면 누구나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거야.
 
물론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하지만 이순을 넘긴 노인이라고 해서 붕새가 되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사회규범인 것 같네. 보통 사람들이 이미 뼈 속 깊숙이 스며든 사회규범들과 편견들을 깨고 넘어서는 게 쉽지 않지. 그래서 김수영 시인은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에서 자유롭게 비상하기 위해서는 ‘피의 냄새’를 맡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네.

“푸른 하늘을 制壓하는/ 노고지리가 自由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修訂되어야 한다.// 自由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절대 자유를 얻기 위해 자기혁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은 어디서나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네. 《장자》에서 붕새가 매미와 새끼 비둘기의 비웃음 대상이 되듯이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걸세. 그래서 노자도 《도덕경》에서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지. 맞는 말이야. 누구도 사회 제도나 규범에 얽매이면서 절대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질서, 책임, 의무, 도덕 등의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규범들이 얼마나 큰 억압인지 모르고 살고 있네. 이른바 사회화가 잘 되어 있는 거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고정관념과 사회규범을 깨고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게 쉽겠나? 어느 곳에서든 붕새는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걸세.
 
을미년에도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니는 ‘소요유(逍遙遊)’의 삶을  계속하고 싶네. 그래서 어제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다시 읽었네. 나도 그 소설의 주인공인 조나단(Jonathan)처럼 푸른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거든. 물론 눈만 뜨면 ‘먹이를 구하기 위해 고기잡이배와 해변 사이를 단조롭게 변함없이 오고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나의 꿈을 비웃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젠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도 지났으니 그런 비웃음마저 격려로 받아들이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당당하게 걸어가고 싶네. 남들 눈치 보면서 ‘이전의 무지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비상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겠지. 많은 비웃음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고독한 비행(飛行)을 계속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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