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시사위크] 북한의 천안함 폭침도발에 대응한 5.24 대북조치가 발표 5년을 넘겼다. 올해도 정부에 대해‘즉각적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북한의 태도변화 없이는 절대불가’란 입장이 충돌하며 어김없이 갈등을 드러냈다. 북한 이슈와 관련해 보수와 진보, 여야가 서로 사사건건 맞서는 양상이 5.24조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예년에 비해 5.24조치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았다는 게 정부당국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몇몇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진보단체나 야당이 성명을 내는 등 입장표명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여론으로 간주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국제 여성단체인 위민크로스(Women cross)가 5.24 제재 5주년 당일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에서 남으로 걸어 내려온 퍼포먼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이는 지난해 4주년 때 5.24 대북조치 해제 쪽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정부도 “북한이 대화에 나오면 해제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물러서는 듯한 입장을 보였던 것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따져보면 짚이는 대목이 있다. 바로 지난 4월 30일쯤 벌어진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공개처형과 5월 8일 북한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다.

언뜻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사안은 모두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이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SLBM 발사를 현장에서 참관했고, 북한은 이튿날 노동신문을 통해 크게 보도했다. 또 자신에게 말대꾸를 하고 회의시간에 졸았다는 이유 등으로 현영철을 잔혹하게 처형한 것도 김정은 제1위원장이다.

문제는 두 사건이 우리 사회의 대북여론을 순식간에 싸늘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김정은이 북한 군부대를 쏘다니며 전쟁분위기 고취와 대남 도발위협을 벌이자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서둘러야 한다는 안보여론이 고조됐다. 현영철 처형은 집권 3년차에 이른 김정은 체제의 잔혹성과 불안정성을 확인케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의 고삐를 풀어주자는 주장은 설 땅을 잃어버린 형국이 됐다.

5.24 조치의 해제를 갈망하던 대북투자자와 남북경협 사업자와 교역업체 종사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대북 제재조치 무용론을 주장하며 무조건적인 해제를 주장하던 일부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5주년을 맞아 5.24조치의 해제여론에 불을 당기고, 정부의 태도변화를 압박하려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김정은 스스로 대북조치의 매듭을 더욱 옭아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아랑곳 않은 채 북한은 노동신문 등 선전매체를 통해 5.24조치를 비방하는데 집중했다. 김정은이 책임자로 있는 국방위원회는 북한의 어뢰에 의한 침몰로 국제합동 조사에서 결론 난 사안을 두고도 “국방위 검열단을 통한 남북공동조사”를 주장했다. 5년 전부터 되풀이해온 낡은 레코드판을 다시 틀어버린 것이다.

정부는 “5.24 조치 해제를 위해서는 천안함 폭침 도발에 대해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일축하고 있다. 북한의 공동조사 요구는 마치 범죄자나 용의자가 수사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나 군부 책임자가 어떤 식으로든 도발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사과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5.24조치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북한 당국의 시인, 사과와 재발방지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게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46명의 젊은 해군 장병들이 희생당한 데 따른 응징 차원의 조치를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냥 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5.24조치는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와 남북교역 중단, 대북 신규투자 금지, 대북지원 보류, 북한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차단 등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재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북경협사업에 참여한 우리 기업들의 발만 옥죈다는 불만도 나온다.

사실 국제사회에서 특정 국가나 체제를 대상으로 경제제재가 제대로 약발을 발휘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북한은 중국이란 산소호흡기가 있으니 숨통이 트인 상황이란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5.24는 제재가 아닌 자해(自害)’란 말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정부는 “연간 3억달러 이상의 고통이 북한에 가해지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도 5.24조치 해제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한이 대남이나 대외 도발에 대해 외교적인 사과나 유감표명을 한 전례가 없는건 아니다. 이 때문에 김정은 체제가 결국 태도변화를 보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5.24 조치를 풀지 않고서는 남북경협이나 대북투자 등 북한 당국이 원하는 사업들이 제대로 가동되기 힘들다는 걸 김정은도 절감하고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대남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는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내각 수상이던 1972년 5월 처음 이뤄졌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 조율 차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4년 만에 사과했다.

김일성은“나도 모르게 좌경맹동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19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도 고개를 숙였다.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중이던 미군 2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무참히 살해하자, 미국 측은 항공모함과 전폭기를 동원한 응징 보복에 착수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사흘 만에 군사정전위 북측 수석대표 명의로 ‘유감’을 표했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북한의 사과표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도 나왔다. 1996년 9월 강릉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 사건으로 우리 민간인과 군인 등이 피해를 입자 유감 표명과 재발 방지 약속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9월에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이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언제,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관건이다. 그가 시인과 사과, 재발방지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과를 통해 5·24란 굴레를 벗고 남북관계 진전과 대외 개선에 나설 용단을 내릴지가 초미의 관심이 된 것이다. 북한이 천안함 폭침 도발에 대한 솔직한 유감표명을 하고, 우리 정부도 그에 발맞춘 전향적인 5.24조치 해제방안을 논의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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