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마스크 요청하면서 대남비방 열 올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시사위크] 우리 사회를 강타한 메르스 사태의 여파로 북한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자칫 메르스가 휴전선을 넘어 북측에 유입될 경우 체제유지의 불안요인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 내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차단에 고심하고 있다. 남북한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인 개성공단에는 열감지 카메라가 배치됐고, 북한 근로자들에게는 마스크가 제공됐다. 모두 북한이 우리 당국에 지원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왔던 북한이 도움을 먼저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메르스에 대응하려는 북측의 다급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북한이 이처럼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열악한 보건의료 부문 여건 때문이다. 오랜 경제난으로 약품이나 의료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제대로 된 방역체계를 갖출 능력이 없었을 것이란 게 당국의 판단이다. 실제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의료지원을 받아왔다.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이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20년이 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당국의 평가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사실상 와해상태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만성적인 경제난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의료보건체계의 마비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는 얘기다. 실제로 수술환자들에게 투입할 마취제나 주요 약품이 없어 고통이 심화되고 수술후 환자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한이 이런 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개선책을 마련하거나 외부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체제유지나 선전을 위한 겉치레식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망신 4대 질병’이란 용어다. 북한은 결핵·간염·성병·정신병 등 4대 질병의 발병률 저하를 위해 도당 교육부를 통해 이들 질병의 북한 내 발병률과 남한에서의 발병률을 수시로 비교 분석하고 있으며, 질병의 북한 내 발병률이 남한 내 발병률 수치를 넘어설 경우 의사담당구역제에 의해 해당 담당구역 의료책임자를 엄중 문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 당국에 따르면 북한 강원도 천내군 49호 정신예방원에서는 군내 정신병 발병지표가 3%에 도달하자, 남한의 전국 평균치 2.5%를 상회했다는 이유로 이 병원 행정책임자인 기술부원장과 초급당비서를 철직(면직) 했다. 치료나 질병예방 자체보다는 냉전시기에나 있을법한 체제대결에 더 치중하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북한 의료보건정책의 특성은 크게 무상치료제와 의사담당구역제, 고려의학(한의학) 중시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자력갱생’을 모토로 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의료보건체계는 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제약공업만 보더라도 여타 산업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자립만을 강조함으로써 외부의 선진기술과 원료 도입의 길이 막혀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의 의료보건 분야에 대한 교시도 한 몫했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 20일 보건성 간부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의학은 예방의학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김일성은 “제약공업이 아직 발전되지 못한 조건에서 약초재배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면서 “모든 보건기관들에서 약초를 많이 심어 생약에 대한 수요를 자체적으로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이후 북한은 역량이 부족한 제약공업에 주력하기 보다는 약초재배에 집중했다.
물론 북한에도 평양제약공장, 나남제약공장, 순천제약공장 등 생산시설에서 해열제인 아날빈, 아스피린, 설사약 등의 양약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량이 워낙 적어 구색 갖추기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역량을 한방약인 ‘고려약’ 제조에 쏟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최근에도 약생산에서의 자력갱생과 약초재배만을 강조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고려의학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더불어 북한의 허술한 의료체계 역시 북한주민들의 건강을 위험에 빠트려버렸다. 의료체계의 가장 큰 허점은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전문의 숫자는 동의사 1,200명을 포함해 1만2,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전체인구가 약 2,400만명인 점을 고려한다면 의사 1인당 주민 2,000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의사 1인당 담당인구수 784명에 비해 매우 많은 숫자다. 그나마 있는 의사들도 생계유지를 이유로 본업보다는 장사로 전직하기를 희망하고 있어 북한 의료체계의 장래를 어둡게하고 있다.

49개에 불과한 종합병원도 모든 북한주민을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특히 계층분류에 따른 차별치료 역시 북한 의료정책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표적인 당·정 간부 진료기관으로는 남산진료소·봉화진료소등이 꼽히며 여기에는 북한 최고의 의료진과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첨단 의료장비와 고가의 수입 의약품이 갖춰져 있다.

일반주민들은 리단위나 군단위 병원을 이용하는 것이 고작인데, 이들 병원에는 대부분 정규의사가 아닌 부의사나 준의사가 1~2명이 배치돼있고 의료시설도 X-Ray가 고작인 것으로 전해졌다.

구조적인 의료체계 미비와 함께 의사들의 부정부패 역시 문제다. 북한은 1980년 제정한 보건법에서 ‘보건일꾼들은 전체인민을 건강한 몸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참가하게 하는 영예로운 혁명가’라고 규정, 의사들에게 도덕성에 입각한 활동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식량난 등 생활고 속에서 의사들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있다. 진료기회가 워낙 하늘에 별따기다 보니 환자들의 입․퇴원이나 각종 진단서의 발급, 의약품 밀반출 등 부정사례가 만연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북 의료지원은 1994년 김일성 사망과 이듬해 대홍수로 망가진 북한의 의료체계를 돕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04년 4월 평북 용천군에서 발생한 열차폭발사고 구호과정에서 대한적십자사나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 의약품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북한은 메르스 차단을 위해 장비와 마스크까지 우리 측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선 우리 정부의 대응을 빌미로 대남비방과 반정부 투쟁을 선동하고 있다. 인도적 지원을 요청해 약품·장비를 챙기면서 비방을 일삼는 이율배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민생을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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