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전 시사저널 정치팀 팀장,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실 국장, 전 청와대 정책비서실 국장
[시사위크] 미국에서 지난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청와대가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새벽 3시30분경이었다. 청와대 참모들은 어느 누구도 곤히 잠자는 김대중 대통령을 깨울 엄두를 못냈다. 나라밖 일이고,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알게 될 테니까. 이때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이 과감하게 전화로 대통령을 깨웠다. 부시시 일어난 김 대통령은 마치 국내에서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신속하게 움직이며, 오전 6시경 청와대 수석회의를 소집했고, 제대로 세수도 못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70대 중반 고령의 대통령이 새벽부터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와 행정부는 더 빠르게 움직였고, 이런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지도자 1명의 태도가 많은 것을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대응태도는 어떤가?

리더십의 전염성이라는 말이 있다. 지도자의 리더십 스타일이 참모 나아가 국민 전체에 그대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지도자가 빠르면 참모들도 빠르고, 지도자가 느리면 참모들도 느리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어사전을 보면, 전염(傳染)이란 ‘병을 옮긴다’는 뜻도 있지만, ‘사람의 스타일, 습관, 태도 등이 널리 퍼진다’는 뜻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천근 바위같은 안정감과 규범성 같은 장점이 많지만, 가장 큰 단점은 답답함과 느림이다. 정책결정이 느리고, 인사가 느리고, 여론 수렴이 느리고, 위기대응이 느리다. 이완구 전 총리 사퇴 이후 황교안 총리 취임 때까지 1개월이 넘었고, 청와대 정무수석이 2달 가까이 공석이며, 국회법 시행령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얘기가 나온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유난히 느린 이유는, 1960~70년대 아버지 밑에서 18년 동안 상하관계와 위계체제를 보고 배우면서, 수직적 리더십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수식적 리더십은 대통령→비서실장→수석→장관→차관→실무 라인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때문에 느리다. 최근 메르스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난 초동 대응 실패와 이후 늑장 대응, 뒷북 대응, 부실 대응은 모두 느림에서 비롯된다. 10일간의 방역공백, 감염자 격리실패 등 곳곳에서 뻥뻥 뚫린 것도 느린 수직적 리더십 때문이다.

오늘날 21세기는 수평적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가? 수평적 리더십은 대통령과 참모, 여야 지도부, 행정부 등이 수평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빠르고 역동적이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는 전화 한통화로 끝난다.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고, 자주 반응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밤 10시 30분 심야 긴급 기자회견, 그리고 김무성 대표의 발 빠른 현장방문이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수평적 리더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리더십의 전염성 이론은 삼성서울병원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삼성을 이끄는 이건희 회장은 다른 곳도 아니고 감염자가 가장 많은 삼성서울병원에서 1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국내 최고, 아니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삼성의료체계가 뻥뻥 뚫린 것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뻥 뚫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최고 경영자의 리더십 공백이 휘하 병원의 리더십 공백으로 이어진 느낌이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문 대표의 리더십이 폐쇄성을 보인 탓인지, 얼마 전에 태동한 혁신위원회 구성원 면면도 폐쇄적이고, 그들로부터 쏟아져 나온 말들도 다분히 폐쇄적이고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리더십의 전염성은 아주 무섭다. 대통령이 거칠면, 참모들도 거칠고 나아가 국민들도 거칠어진다. 대통령이 느리면 참모와 관료들은 퉁퉁 불어터진 국수처럼 더 느려진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전쟁이나 다름없는 전염병 상황이 국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때에 대통령은 쇼핑몰을 방문해 미소 짓고 손 흔들며 ‘걱정 마라!’고 말하기보다 병원과 관련 기관을 누비며 비장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걱정하지 않도록 혼신을 쏟겠다’는 의지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새벽 대책회의, 심야 대책회의도 열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과거 선거승리를 위해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았던 각오로 임했지만, 이제는 메르스 타파를 위해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는 각오로 불철주야 뛰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좋은 리더십이 메르스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퍼져나가서,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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