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아 결국 숨진 직원이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부장판사 이승택)는 지난 19일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김모 씨의 유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난 1992년부터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한 김씨는 10여년 만인 지난 2002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이어 지난 2011년엔 다발성 골수종에 따른 신장 손상으로 말기 신장병 진단을 받았고, 결국 만성 신부전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씨가 현대중공업에서 맡은 업무는 도장 작업보조였다. 주로 페인트와 시너 등 도장작업용품을 관리했다. 사용하고 남은 페인트 및 시너, 폐호스 등을 수거하고, 남은 페인트와 시너를 폐기용 드럼통에 모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맨손으로 페인트나 시너를 만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또한 잔류 가스로 인한 폭발을 막기 위해 페인트 및 시너 통 윗면을 절개하는 과정에서 가스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문제는 김씨가 이렇게 취급한 페인트 및 시너에 유해물질인 벤젠이 다량 함유돼있었다는 점이다. 벤젠은 국제적으로 업무상 질병과 연관 관계가 인정된 물질로, 국제암연구소는 벤젠을 1등급 발암인자로 분류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벤젠의 공기 중 허용농도 규제를 2003년부터 1ppm으로 강화해 적용 중이다. 이전까진 10ppm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보호장구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작업 현장엔 환기 시설도 없었다.

◇ ‘위험의 외주화’ 중단하고 ‘진짜 사장’이 책임져야

이에 김씨의 유족은 김씨가 업무상 장기간 유해물질에 노출돼 다발성 골수종이 발병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 측은 최초 진단 시점과 작업 현장의 유해물질 농도가 미미한 점 등을 들어 지급을 거부했고, 소송으로 이어졌다.

재판부는 “1990년대에는 페인트 및 시너에서 벤젠 함유량이 상당히 높게 검출됐고, 2003년까지 국내 벤젠 농도 규제가 매우 느슨했다”며 “이런 환경 속에서 김씨는 특별한 보호구도 없이 페인트와 시너를 직접 손으로 만지는 등 유도 가스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씨는 2002년 10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고, 병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사정을 볼 때 김씨는 페인트와 시너의 운반 및 폐기 업무를 한 7년여 동안 상당량의 벤젠에 노출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벤젠에 장기간 노출됐을 경우 다발성 골수종 발병 위험이 높다는 학계 이론 등을 고려해 업무로 인한 사망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의 소송을 지원한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측은 “이번 판결이 조선업계, 그 중에서도 현대중공업에 만연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죽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돼야한다”며 “기업인권네트워크 등이 만든 ‘현대중공업 산재발생에 관한 의견서’에 따르면 지난해 현대중공업에서 사망한 13명 모두 사내하청 노동자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청업체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더 적은 노동력으로 더 짧은 시간에 작업량을 달성하려 할 가능성이 높고, 영세한 하청업체가 작업 환경을 개선할 여지나 의지는 적을 수밖에 없다”며 “사내하청 노동자는 구조적으로 사망 사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은 산재 사고가 줄었다는 이유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000억원 가까운 산재보험료를 할인받았다. 원청이 산재 발생 가능성이 높은 작업 부문을 의도적으로 하청업체로 이전함으로써 자신의 산재 발생률은 줄이는 ‘위험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진짜 사장’이 책임져야 한다.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산재를 포함해 사업장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해에 책임을 지고, 사고 예방과 피해자 구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