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어디로/ 가야 길이 보일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잃고/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찾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 오 그렇구나 그렇구나/ 도시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 눈물 맺혀 반짝이는 눈동자여// 흙과 서로의 몸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바로 길이었다”
 
김준태 시인의 <길 – 밭에 가서 다시 일어서기 1>일세. 정말 어디로 가야 길이 보일까? 암담한 시대일세.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기 힘든 절망의 시대야. 날마다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보고 듣는 글과 말들은 점점 험악해지고, 정부와 민간연구소들이 발표하는 각종 통계들은 우리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들뿐일세.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게 옳고 현명한 것인지 이순을 넘긴 나도 혼란스럽네.
 
시인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길이라고 하는구먼. “도시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 “흙과 서로의 몸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길이라고 말하네. 무슨 뜻일까?
 
어디를 가든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등이 다니는 길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 우리나라만 해도 농촌 마을의 좁은 고샅에서 전국 방방곡곡을 잇는 고속도로까지 엄청나게 많은 길들이 있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길들 중 내가 만든 길이 몇 개나 될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그냥 따라가고만 있을 뿐 스스로 길을 만들지는 않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습도 비슷하네. 얼른 보면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어진 사회규범을 지키고 유행을 따르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엄격하게 말하면 ‘주체적’인 삶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어.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아무런 성찰 없이 무작정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뿌리고 키우는 주체적인 삶을 권유하고 있네. 나 또한 우리들 각자가 자신만의 길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들이 쫓는 행복은 가까이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는 한 마리 파랑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지금 여기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에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라에서는 쉼이나 ‘저녁 있는 삶’을 찾을 수가 없네. 왜냐고? 우리들의 물질적인 욕망의 기준이 점점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고 있으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진 사람도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네.

삶의 목표와 기준을 바꾸는 것도 주체적인 길을 만드는 한 방법일세.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물질적인 성공만 쫒다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사는 게 함께 사는 길인지,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게 왜 중요한지 등에 관해서는 고민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주체적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냥 남들과 똑 같아지려고만 애쓰는 사람들만 눈에 띄는 세상일세.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아무런 주체성 없이 그냥 남들과 똑 같이 살아가는 대중들을 보면서 갑자기 구토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난 ‘잘 먹고 잘 살자’는 허망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사람들이 낯설게 보일 때면 김중식 시인의 <이탈한 자가 문득>을 큰소리로 읽는다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진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삶의 목표와 기준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 학교, 군대, 텔레비전, 신문 등 이른바 사회화기관을 통해 우리들의 신체 속에 스며든 규범과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관습이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시작하면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태양이나 뭇별들처럼 그냥 지금 그 궤도에서만 돌고 돌다가 가는 게 편하다고? 그래도 나는 수억 년 동안 한 궤도만 뱅뱅 돌다가 그게 지겨워서 그 궤도를 이탈하여 캄캄한 밤하늘에 획을 그으면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되고 싶네. 혼이 비정상이어서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일탈을 꿈꾼다고?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