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며칠 전 정장 차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들이가 있었네. 검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전철 타고 가는데 얼마나 더운지 다 벗어 던져버리고 싶더군. 여름에 경조사에 갈 때면 의복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자들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 같네만난 그런 날이면 황인숙 시인의 <바람부는 날이면>를 읊조리면서 더위를 이겨내려고 애쓰네.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다섯 행으로 이루어진 짧지만 맑고 발랄하고 통쾌한 시일세.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이면 나는 저 시의 화자처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부러워. 흔히 말하는 관음증 때문에 그러는 건 절대아니니 오해는 말게나. 요즘 여성들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할 게 너무 많아. 특히 우리처럼 성희롱이 어디까지인지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하고 자란 세대의 남자들은 더 조심해야 하네. 내가 여성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는 걸 부러워하는 건 순전히 실용적인 측면에서야. 무더운 여름날 다리 사이로 올라오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할지 우리 남자들은 정말 모르거든.
 
여름에 남자들, 특히 나이 든 분들, 옷 입고 다니는 걸 유심히 보게. 실외 온도가 30도가 넘는 날도 다리를 다 덮는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하게 보이는지옷 입는 것도 일종의 문화야. 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공동체 구성원들의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거고. 그러면 이 나라에서 언제부터 여름에도 남자들이 긴 바지를 입는 게 규범이 되었을까? 내 추측으로는 100년도 되지 않았을 것 같네만. 서양에서 들어온 다른 것들은 실용적이라고 다 받아들이면서도 왜 긴 바지는 계속 입고 있는 건지?
 
30여 년 전 미국에서 공부하던 때가 생각나네. 난 사회학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의 복장이 좋았어. 여름이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강의실에 들어오는 교수들이 많았거든. 여교수 한 분은 수업을 하면서도 아직 유아인 딸에게 젖을 물리기도 하더군.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를 억압하는 규범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네. 반면에 같은 건물을 사용한 다른 사회과학 전공 교수들의 복장은 많이 달랐네. 무더운 여름에도 거의 모든 교수들이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나오더군.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옷차림이었어. 규범에 얽매어 관습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내 전공 교수들과는 크게 달랐네.
 
그래도 미국은 옷을 자유롭게 입는 남자들이 더 많은 사회야. 미국과 한국의 관료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게나. 두 가지 의미 있는 차이가 눈에 뛸 걸세. 하나는 남자들의 복장이고, 또 하나는 남녀 비율이야. 미국은 회의에 참석한 여성 관료들의 수가 우리보다 많고, 남성 참석자들도 자유로운 캐주얼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
 
반면에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관료들은 대부분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야. 아직도 우리가 권위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림이지. 그러면 지금 한국을 포함한 동양 남자들이 입는 그 검은 옷은 어디서 온 걸까? 서양에서 들어온 복장을 서양인들보다 더 고집스럽게 입고 있는 보수적인 동양 남성 관료들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지만 한국 남자들도 이제는 여름에 긴바지를 벗을 수밖에 없을 걸세. 왜냐고? 한반도의 아열대화로 여름이 점점 길어지고 있거든. 1950년대에 101일이었던 여름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121일이 되었네. 일 년 365일 중 3분의 1이 여름인 거지. 5월말에 시작했다가 9월 말에 끝나는 긴 여름을 잘 나기 위해서는 옷 입는 관습도 바꿔야 하네.
난 여름이면 주로 반바지를 입네. 우리사회의 규범이나 관습에 저항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냥 시원해서 입어. 물론 밑이 확 트인 여성들의 스커트와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이 좋거든. 그래도 가끔 여자들처럼 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기도 해. 그것도 계단을 오를 때 모자로 허벅지를 가려야 할 만큼 아주 짧은 스커트를그래서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는” “스커트 자락의 상쾌!”를 나도 맛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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