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여성들이 정부의 낙태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낙태를 합법으로 할지, 불법으로 할지는 세계 정치권의 오래된 논제다.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며, ‘신의섭리’ 대 ‘인간’이라는 종교적 관념의 대결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이념이 덧붙여지고, 여성인권운동과 의료계의 이해관계까지 맞물리면서 동성애 합법화와 함께 전세계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 잡았다.

복잡다단한 논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하게 귀결된다. ‘그래서 찬성이냐 반대냐’다. 중간지대는 없다. 강간 등 원치 않는 임신에 예외적으로 허용하자는 입장은 ‘낙태반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반대로 산모의 건강에 따라 예외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낙태찬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찬반이 명확하다보니 서구 정치권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으로도 작용했다.

선거 등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종교적 신념이나 개인적 철학, 감정과 이해관계까지 모두 얽혀있어 의제의 휘발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마디 말실수에도 각계로부터 십자포화를 당할 수 있다. 일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선후보가 “(낙태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상대방인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이를 집중 공격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연말 대선에까지 영향이 있을 것으로 미국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도 낙태 허용여부가 최근 쟁점이 됐다. 폴란드 집권당은 산모의 건강이 위태로울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냈다. 강간 등 원치 않는 임신도 포함할 정도로 수위 높은 금지다. 폴란드 여성들과 진보단체들이 거리로 나와 강력한 반대시위를 벌였고, 결국 폴란드 집권당은 낙태금지 법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 "낙태한 여성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발언에 대해 미국 뉴욕시민들이 규탄하는 시위를 열고 있다. < AP/뉴시스>
낙태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개정안에는 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규정하고 해당 행위를 한 의료인의 면허를 1년간 정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낙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드러낸 대목으로 해석된다.

사실 낙태는 국내 형법상 구성요건으로 규정된 명백한 범죄행위다. 모자보건법에서도 특정한 사유를 제외하고 낙태는 명백하게 금지돼 있다. 그러나 임신중절수술은 연간 17만 건으로 추산될 정도로 자주 시술되고 있다. 명목상은 낙태를 금지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허용되는 실정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법학계에서는 “사문화된 규정”이라고도 평가한다. 복지부의 시행령이 기존의 법률을 구체화한 것에 불과함에도 논란이 커진 이유다.

여성계의 반발은 거세다. 여성단체들은 지난주에 이어 15일에도 도심에서 집회를 열고, 정부의 낙태금지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냈다. 검은 옷과 함께 모토를 “내 자궁은 나의 것”으로 잡았다. 여성의 출산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이자 자궁이 ‘공공재’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집회소식이 전해지면서 SNS와 유명 인터넷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갑론을박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복지부는 각계의 의견을 청취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낙태허용여부 논란은 향후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찬반에 놓고 시민들의 의견대립이 치열해질수록 대선후보들의 분명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야, 혹은 진보보수를 나누는 최대 기준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크다. 현재까지 정치권에 제시된 담론은 대동소이하다.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제도적으로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있다. 가는 길은 다소 다를 수 있으나 목표는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낙태 문제 등은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명확한 전선이 형성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낙태허용여부를 묻는 질의는 있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반면 이정희 후보는 여성개인이 결정해야할 문제로 보고 낙태를 허용하자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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