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제구실도 못 하는 나를 한 품에 안아 보살펴 주는 크나큰 사랑에 보답하겠다.”

이는 김정은(32)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형 김정철(35)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친형제 간에 오간, 그것도 형이 아우에게 띄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19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히며 평양 로열패밀리 형제들의 근황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김정철은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또 술에 취하면 헛것이 보이고 호텔에서 술병을 깨고 행패를 부리는 등 정신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게 정보위 참석 위원들의 전언이다.

또 남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 2013년 12월 조카 김정은에게 처형당하자 은둔에 들어간 고모 김경희를 동병상련 차원에서 가끔 방문하고 있다는 첩보도 보고됐다.
 
김정철의 이런 모습은 여동생 김여정(27)과 비교된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여정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차관급)에 임명했으며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 평양에서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여정은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간부의 사소한 실수도 수시로 처벌하는 등 권력남용 행태까지 보인다고 한다.

10대 시절 함께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유학했던 삼남매의 운명은 크게 엇갈린 형국이다.

한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정철은 호르몬계 이상을 비롯한 건강문제로 권력에서 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가수 겸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의 음악에 빠져 서방 언론에 노출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해외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3대세습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인 셈이다.

김정철의 이런 모습은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권력을 거머쥐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김일성 주석과 후처인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김평일은 북한 고위층 사이에 ‘곁가지’로 불렸다. 김일성과 본처 김정숙 사이에 낳은 김정일이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자 ‘본가지’가 아닌 세력으로 견제받기 시작한 것이다.

김성애는 김일성 주석과의 사이에 딸 경진과 평일·영일 형제를 뒀다.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자리를 다지면서 냉대를 받았다. 김일성종합대를 나온 김평일은 1981년 유고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3년 근무했다. 평양 귀환 후 인민무력부에서 근무하던 김평일은 1988년 헝가리 주재 대사를 시작으로 불가리아·핀란드·폴란드 대사를 거쳐 현재 체코 대사로 근무 중이다. 사실상 해외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김정철과 김평일의 경우는 차이가 있다. 김정일과 김평일은 이복형제지만 김정은과 김정철은 친형제다. 또 김정철이 3살 많은 형이란 점도 다르다. 이를 두고 김정은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이 아버지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란 진단도 제기된다.

대북 정보 관계자들에 따르면 건강 이상이나 피격 등으로 김정은이 유고 상태에 빠질 경우, 권력을 물려받을 1순위로 여동생 김여정이 꼽힌다. 김여정이 북한 내부 권력승계 순위에서 가장 앞서는 이유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 불리는 ‘김정일 직계’란 점에서다. 김정철의 경우 김정은 권력에 도전하거나 유일영도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거세된 것이란 분석이다.

김정일과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 태어난 김정남(45)도 여전히 관심을 끄는 인물이다. 최근에는 은둔생활 때문에 행방이 묘연한 상태지만, 여전히 포스트 김정은 시대에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김정남은 김정은이 2010년 9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추대된 후 “아버지(김정일)의 선택이 잘못됐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후계 다툼 과정에서 이복동생 김정은 세력에 견제를 받았던 앙금을 풀지 못한 것이다. 김정은이 승기를 잡은 2009년 6월 암살조를 김정남의 해외 근거지인 마카오와 중국 등지에 파견하는 등 위협이 이어지자 행적을 감췄다. 중국 지도부로부터의 신뢰가 두텁고 김정은 혈통이란 점에서 유사시 북한체제를 이끌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 전망도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신변불안 때문에 외부행사 일정과 장소를 갑자기 바꾸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고 한다. 폭발물·독극물 탐지장비를 도입하는 등 신변경호를 대폭 강화한 정황도 포착됐다. 또 사나흘씩 밤을 새워 술 파티를 여는 등 과음·과식으로 인한 건강이상도 문제라는 얘기가 나온다.
 
국정원은 이 같은 정보를 토대로 김정은 정권에 대해 “겉으로는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권의 불안정성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김정은 집권 5년간 전대미문의 폭정으로 김정은·엘리트·주민 간의 3자 결속이 약화하고 민심이반이 심각한 상태라는 경고다.

핵·미사일 도발로 초래된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동요가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지도자 김정은과 그 형제들 사이의 권력게임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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