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생모 고영희를 우상화하려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구상이 본격 추진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지 5년을 채워가지만, 고영희에 대한 찬양 분위기나 선전·선동을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를 암시하거나 예고하는 움직임조차 없다. 이를 두고 생모 우상화를 본격적으로 띄우기 위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거나, 뭔가 걸림돌이 등장했기 때문이란 관측이 나온다.

고영희는 1970년대 초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살며 2남1녀를 두었다. 김정은이 차남이고, 건강문제로 후계에서 밀린 형 김정철이 있다. 여동생 김여정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차관)으로 오빠 김정은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고영희는 이들 삼남매를 10대 시절부터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유학시키면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더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영희는 김정일의 첫 여자로 알려진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을 밀쳐내고 평양 권력의 안방을 차지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 김정남을 뒀다. 한때 장자계승이란 유교적 원리에 따라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 1순위란 분석이 나왔지만, 결국 김정은이 왕관을 썼다. 여기에는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고영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고영희는 유선암에 걸려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치료를 받다 2004년 현지에서 숨졌다. 김정은이 스무살 되던 때다. 이런 생모에 대한 각별한 마음 때문에 김정은은 집권 이후 평양에 유선암 센터를 완공했다. 또 ‘어머니 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꽃도 드리고 선물도 하라며 공휴일로 정한 것이다. 지난 16일이 바로 북한의 제5회 어머니 날이었다. 김정은은 이를 계기로 17~18일 이틀간 평양에서 사회주의여성동맹 6차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일정이 잡히면서 고영희 우상화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김정은이 자신의 생모를 주민들에게 내세워 ‘평양의 어머니’로 치켜세우게 하려는 의도란 얘기였다. 그렇지만 노동신문 등 관영매체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 등을 ‘조선의 어머니’로 찬양하는 보도를 내보내면서도 고영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5차 대회 이후 33년 만에 개최된 여맹대회도 관심을 모았다. 30세 이상 북한 전업주부들의 조직체인 여맹은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가 27년간 위원장을 맡는 등 여성들에게는 상징적 조직이다. 하지만 행사 내내 고영희를 암시하는 표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조선민주여성동맹'이란 명칭을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으로 65년 만에 바꾸는 결정만 이뤄졌다.

김정은에 의한 생모 우상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김일성 장례를 치른 지 보름 남짓한 2012년 1월,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독서지도를 받는 김정은의 모습이 담긴 기록영상을 공개했다. 고위 간부들에게는 고영희의 육성과 영상이 담긴 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을 비공개리에 관람토록 한 일도 있다. 노동신문에 생모를 ‘평양의 어머니’로 묘사한 찬양 글을 실은 것도 이때쯤이다. 지방 현지지도를 나간 김정일을 기다리는 고영희의 모습을 묘사하며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영희 우상화 작업은 중단됐다. 교과과정에 김정은 우상화 교과목이 등장하고, 관영 선저매체들이 연일 김정은 찬양과 선전에 나서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를 놓고 탈북인사들과 북한 전문가들은 고영희의 출신성분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일 것이란 해석을 제기한다. 고영희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째포’란 표현으로 멸시받던 재일동포 출신이란 사실이 결정적인 문제로 등장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52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10살 때 만경봉호를 탄 북송 재일교포다. 아버지 고경택은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 눈에 들었다. 당시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주민들의 편견은 강했다.

고영희의 아버지가 일제시대 육군성이 관할하는 군복공장 간부로 일한 경력도 껄끄러운 대목이다. 북한이 조총련 등을 통해 고영희 관련 일본 행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군수공장이 비밀로 부쳐온 자료가 공개되면서 드러났다. 제주 출신인 고경택은 일제 시대인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성이 관할하는 히로타 군복공장에 들어갔다. 북한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벌였다며 주민들에게 이를 내세운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김일성과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어 준 게 며느리 고영희의 부친이란 얘기가 된다.

내년 1월 8일 김정은은 33회 생일을 맞는다. 아직 북한이 발행한 내년 달력이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휴일 지정여부가 대북 관측통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다. 그동안 자신의 생일을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고 휴일 지정도 미뤄온 김정은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만약 북한이 김일성·김정일 생일처럼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정한다면 김정은 우상화는 정점을 치달을 수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최근 보도에서 “다음해 1월 김정은 각하의 탄생일을 성대히 축하하며…”라는 언급을 했다. 일각에서는 내년 생일을 ‘은하절’로 부르기로 했다는 말도 나온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내년 1월 8일은 일요일이라 휴일 지정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흘 연휴로 만들거나 김정은 출생일이란 점을 처음으로 명시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모 우상화를 둘러싼 김정은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오사카 출신의 북송교포란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고영희 일가의 친일 행적 논란이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탄다면 치명일 수 있다. 북한 권력층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백두혈통이 아닌 일본 후지산 줄기”란 비아냥도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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