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위크> 이형운 발행인
[시사위크=이형운 발행인]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거위의 꿈을 접겠다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촉발시킨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의 갈등 봉합을 호소하면서 젊었을 때부터 고이 간직했던 그 꿈을 접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필자는 20여년 전 이정현 대표를 처음 만났다. 당시 당직자였던 이 대표는 투박하지만 열정적인 말투로 기자들과 교감을 이뤘다. 기자신분이었던 필자에게도 이 대표는 당시 당이 처한 상황 등을 거침없이 설명하면서 협조를 구했다. 그 만남 이후 이 대표와 필자는 오랜 시간 동안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호남 출신인 이 대표는 당직자 생활을 할 때 출신지 때문에 숱한 오해를 받았다. 언론 관련 문건이 한 언론을 통해 유출됐을 때 그는 당을 떠난 적도 있었다. 자신이 작성한 문건을 언론에 공개할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당시 사무총장은 문건 유출자로 이 대표를 지목하고 당직을 박탈했다.
 
당직을 잃은 이 대표의 출근지는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문고였다. 아침 일찍 교보문고로 출근한 이 대표는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세간살이가 변변하지 못하던 때라 읽고자 하는 책을 살 수가 없어 교보문고에서 책을 본다고 했다.
 
문건유출의 누명을 쓴 이 대표는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며 거위의 꿈을 키웠다. 영남 출신 아니면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던 한나라당에서 국회 배지를 달고 당을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키웠다. 그래서 그는 문건유출의 누명에도 불구하고 당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서너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이 대표는 누명을 벗고 다시 당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당으로 복귀한 그는 거위의 꿈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당내에서 출신이 변변치 못한데 배지라도 달 수 있겠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뿐만 아니라 광주 5·18 민중항쟁의 원죄를 지고 있는 한나라당 간판으로 광주를 지역구로 총선에 출마하는 것은 볏단을 지고 불덩이에 뛰어든 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광주로 출마를 했다. 낙선할 줄 뻔히 알면서도 광주 출마를 강행했던 건 거위의 꿈때문이었다.
 
또 이 대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경선캠프 참여 부탁을 거절하며 박근혜 대통령과 한 배를 탔다. 박 대통령 덕에 어렵게 전국구 국회 배지를 달았고,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거쳐 고향인 순천에서 내리 두 번이나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 여세를 몰아 호남 불모지인 새누리당의 당 대표까지 올랐다.
 
당 대표에 오른 이 대표는 부조리한 정치를 바꾸고 싶어 했다. 출신과 학벌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국회 배지를 달 수 있는 정당풍토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이 대표가 꿈꾸던 거위의 꿈이었다.
 
불행히도 대표직에 오르자마자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이 대표는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거위의 날개를 접을 처지에 놓였다. 대중의 인기영합적인 행보를 펼쳤다면 한 동안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과감히 거절하고 박근혜 정권과 운명을 같이했다. 과거 당 대표를 했던 사람도 박근혜 정권이 위기에 봉착하자 홀연히 돌아서며 난도질을 해댔지만, 그는 배신하지 않고 국민들의 비판을 온몸으로 받았다.
 
박근혜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인 이 대표가 최순실 게이트를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은 막중하다. 그렇지만 그는 그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초에 청와대 눈치를 보며 아부를 떨던 많은 정치인들이 등을 돌릴 때에도 그는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인기 영합적이고 책임감 없는 정치를 바꾸는 게 이 대표가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표의 거위의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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