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시사위크] 지난 17일 8차 촛불집회에도 77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지난 9일 국회에서의 압도적 탄핵 가결로 주춤할 것 같았던 촛불집회가 여전히 밝고 환했다. 겨울광장은 여전히 평범한 시민들의 온기로 채워졌다. 아이를 안은 가족들부터 동호회, 시민단체 등 다양했다. 광장에서 송년모임을 잡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산타클로스도 등장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대형 트리가 세워질지도 모른다. 올해의 마지막 날에도 촛불은 타오를 것이다.

가장 늦게 광장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은 탄핵 가결 이후 빛의 속도로 달아났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권 대부분은 광장에서 등을 돌린 채 개헌논의에 불을 지피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에게 개헌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들에게 개헌은 앙시앙 레짐을 끝낼 묘약이다. 지금의 박근혜 게이트가 마치 낡은 헌법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은 낡은 헌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규정한 헌법을 송두리째 파괴한 집단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이 헌법을 위반한 사건이다. 국가를 사유화하는데 모든 권력기관이 동원됐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왜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사죄하고 수사받고 감옥에 가야 하지만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며 반격을 꾀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탄핵 이유가 없다’고 했고, 세월호 책임도 없다고 했다. 검찰수사를 거부한 대통령은 심지어 234명이라는 압도적 가결을 이끈 국회도 모욕했다.

황교안 총리를 보라. 박근혜식 통치스타일을 계승한다. 대통령에 오른 것처럼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인사권마저 서슴없이 행사한다. 야당에겐 오만하다. 대통령이 탄핵됐는데 스스로 물러나는 장관 한 명 없다.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를 지나고 있는가. 서청원의 말은 우리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 패륜이란다.

새누리당은 공범이고, 공범은 해체한 뒤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감옥에 가야 하지만, 또 다시 친박을 지도부로 뽑았다. 누구 하나 의원직을 내놓지도 않았다. 친박은 물론 비박도 그렇다. 범죄집단에 남아 눈치보며 재기나 노리고 있다. 유승민의 좌고우면도 이쯤 되면 진절머리가 난다.

대법원장과 고위법관을 사찰한 증거가 나와도 국정원장은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국정조사 증인들은 휴가 가느라, 사춘기 자녀를 돌본다는 이유로 증인출석을 거부한다. 그래도 무사하다. 국민들은 고통스러운데 그들은 무사하다. 이건 나라가 아니다. 국가가 아니다. 청와대는 개나소나 들여보내던 청와대 문턱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에겐 허용하지 않았다.

21세기에 우리를 지배한 것이 봉건왕조라니 기이할 수밖에 없다. ‘짐이 곧 법’인 시대에서 나온 일종의 간악한 무리들이 21세기 공화국을 찬탈했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것이 명백히 밝혀진 뒤에도 태연하게 청와대와 정부를 장악한다. 증거를 인멸한다.

이것이 모두 낡은 헌법 때문인가.

단순한 질문을 하나 하자. 부패세력 척결이 먼저인가, 개헌이 먼저인가.

여기에 분명히 대답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가짜다. 촛불을 끄려는 시도다.

박근혜가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최순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개헌을 말했다. 탄핵을 머뭇거리며 공분을 샀던 김무성이 개헌을 말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된 뒤 다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된 정우택은 이 사상 최악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개헌을 말했다. 지금 개헌을 말하는 자 대부분 이 앙시앙 레짐을 떠받치던 기득권 주축들이다. 혼란의 와중에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쥐어보려는 속셈으로 개헌론을 밀어붙인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개헌론자들은 분명히 답해야 한다. 이 끔찍한 부패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해 단 한 가지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것 없는 개헌론은 모두 가짜다.

법은 한가한 권력 나눠먹기 놀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 폰 예링은 “법이 불법으로부터 자행되는 공격에 충분히 대처해야만 하는 한 법에게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했다. 지금은 헌법을 파괴한 대통령 일당과 투쟁할 때다. 하물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개헌으로 불법집단의 살 길을 열어주어선 안 된다.

탄핵안이 가결됐지만 국가위기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위기는 그대로이고 범죄자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는데 일부 정치인들이 시민혁명의 전리품을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탄핵은 결정되지 않았고 공범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연금까지 악용한 재벌들을 벌하지도 못했다. 최순실 일파의 재산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김기춘, 우병우는 구속도 되지 않았다. 검찰개혁, 재벌개혁, 언론개혁, 정치개혁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부패 기득권 체제 청산에 힘을 모으는 것이 먼저다. 촛불에 참여해 이 나라를 바꿔야 한다. 개헌이 아니라 강력한 연대투쟁이 필요한 순간이다.

개헌은 다음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임기 시작 6개월 안에 할 수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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